소나무를 만나
- 박곤걸
바람을 다스리지 못하겠거든
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만나
말 대신 눈으로 귀를 열어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절제하고, 절단하고
바람이 부는 날
하늘에다 온몸으로 수화하는
나무의 설법에 큰절하고
잘 늙은 소나무가 손짓해 주는
그 곁에 가서 뿌리를 내려라
어느덧 산을 닮아
푸른 자태가 제격이면
바람도 솔잎에 찔려 피를 흘린다
- 시집 <하늘 말귀에 눈을 열고> (문예운동, 2002)
* 감상 : 박곤걸 시인.
1935년 11월 경주 건천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 강점기 그리고 6.25 전쟁 등을 겪으면서 대구 사범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957년 졸업 후 경주 입실에서 첫 교직 생활을 시작한 후 40여년 교단에서 시인으로 후학들을 가르치다 영남공고를 마지막으로 교직에서 퇴임하였습니다. 196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서 시 ‘광야’가 당선되었고, 1975년 <현대시학>에 시 ‘환절기’ ‘숨결’ 등이 추천 완료됨으로써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환절기>(형설출판, 1977), <숨결 - 돌에다 건네는 귀엣말>(형설출판사, 1982), <빛에게 어둠에게>(혜진서관, 1987), <가을산에 버리는 이야기>(도서출판 그루, 1995), <딸들의 시대>(도서출판 그루, 1998), <화천리 무지개>(혜화당, 2001), <하늘 말귀에 눈을 열고>(문예운동, 2002) 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무지개 너머>(도서출판 순수, 2006) 가 있습니다. ‘동해남부시’ ‘자연시’ 동인 활동, 문학 계간지인 <시하늘> 주간, 월간 <문학세계> 주간, 국제펜클럽 대구지역위원회 회장, 펜클럽 한국본부 심의위원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 평가를 받아 온 박곤걸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 서늘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한걸음 물러난 은일(隱逸)의 정감을 고스란히 맛보는 묘미가 있습니다. 바람과 소나무, 그리고 푸른 산을 소재로 삼아 이런 시를 읊을 수 있는 시인의 내공이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시집에 실린 글에서 윤강로 시인은 '박곤걸의 시를 읽으면 느리게 호흡하는 시의 기교가 마음의 안식이 된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람 부는 날, 시인은 세차게 흔들리는 소나무를 보면서 그저 바람에 이리저리 정처 없이 휘둘리는 겉 형상만 본 게 아니라 ‘하늘에다 온 몸으로 수화하는/ 나무의 설법’하는 속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바람에도 불편해 하면서 세 치 혀로 온갖 불평을 늘어놓았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 듯합니다. 시인은 이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바람을 다스리지 못하겠거든/ 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만나/ 말 대신 귀를 열어라’고 말입니다. 입보다는 귀를 열고 바람 소리를 들어보라고 속삭이는 시어들이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시인은 아예 한 그루 잘 늙은 소나무가 손짓해 주는 ‘그 곁에 가서 뿌리를 내리라’고까지 말합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정(靜).중(中). 동(動)으로 성장하여 산과 닮을 정도로 자리를 잡게 되면, 그제야 지나가는 바람도 솔잎에 찔려 피를 흘릴 정도가 된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가 찬 결말을 노래한 시인지요!
세파를 이겨낸 솔잎, 그리고 그 솔잎에 바람마저 피를 흘리는 경지가 도대체 어떤 경지일까요. 몇 년 전 개봉 되었던 영화,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라는 마지막 대사로 유명했던 영화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최종 병기 활>이라는 제목의, 조선 최고의 궁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지요. 세상살이에서 그저 운명적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바람’이 아니라, 그 바람을 극복하는 불굴의 의지와 강인함, 그리고 통쾌한 복수를 은유적으로 잘 표현해 냈기 때문에 천만 관객에는 약간 못 미쳤지만 꽤 흥행했던 수작의 영화였습니다. 아마도 그 영화의 주인공의 모습이, 오늘 감상하는 시에서 노래하는 ‘소나무’의 이미지를 닮았다고나 할까요.
이쯤에서 시인이 태어난 고향 마을인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를 노래한 시 한 편을 더 감상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세상살이 아픔을 삭이고 침묵의 수행으로 온갖 헛생각 다 거두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싶었던 시인의 마음이 듬뿍 스며있는 시입니다. 그는 이런 다짐으로 삶을 살아내다가 2008년 12월 21일, 아쉬운 나이인 73세에 유명을 달리하였으며 선영인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 안장되었습니다. - 석전(碩田)
화천리 무지개
- 박곤걸
안개가 맨발로 마당에 들고
그 산골에 도라지꽃 같은 순정이 있다
가슴에 오래 뿌리내린
속마음 꽃보다 더한 향기로 웃음이 피어있다.
인연의 끈으로 풀리지 않는
눈빛으로 열은 따슨 가슴
그 마음이 체온보다 따스하다
세상살이 아픔을 삭이고
뼈있는 말, 피 같은 말 한마디
목숨 그것을
다 바쳐서 사랑이라 했으니
침묵 그것을
다 모아서 말씀이라 했으니
푸른 하늘도 내려와 베푸는
그 뜨락에 노래하는
새소리 내다보며 그 많은 헛생각을 다 거둔다
- 시집, <화천리 무지개>(혜화당,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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