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소나무를 만나 / 화천리 무지개 - 박곤걸

석전碩田,제임스 2021. 6. 16. 06:45

소나무를 만나

                          - 박곤걸

바람을 다스리지 못하겠거든
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만나
말 대신 눈으로 귀를 열어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절제하고, 절단하고
바람이 부는 날
하늘에다 온몸으로 수화하는
나무의 설법에 큰절하고
잘 늙은 소나무가 손짓해 주는
그 곁에 가서 뿌리를 내려라

어느덧 산을 닮아
푸른 자태가 제격이면
바람도 솔잎에 찔려 피를 흘린다

- 시집 <하늘 말귀에 눈을 열고> (문예운동, 2002)

* 감상 : 박곤걸 시인.

1935년 11월 경주 건천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 강점기 그리고 6.25 전쟁 등을 겪으면서 대구 사범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957년 졸업 후 경주 입실에서 첫 교직 생활을 시작한 후 40여년 교단에서 시인으로 후학들을 가르치다 영남공고를 마지막으로 교직에서 퇴임하였습니다. 196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서 시 ‘광야’가 당선되었고, 1975년 <현대시학>에 시 ‘환절기’ ‘숨결’ 등이 추천 완료됨으로써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환절기>(형설출판, 1977), <숨결 - 돌에다 건네는 귀엣말>(형설출판사, 1982), <빛에게 어둠에게>(혜진서관, 1987), <가을산에 버리는 이야기>(도서출판 그루, 1995), <딸들의 시대>(도서출판 그루, 1998), <화천리 무지개>(혜화당, 2001), <하늘 말귀에 눈을 열고>(문예운동, 2002) 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무지개 너머>(도서출판 순수, 2006) 가 있습니다. ‘동해남부시’ ‘자연시’ 동인 활동, 문학 계간지인 <시하늘> 주간, 월간 <문학세계> 주간, 국제펜클럽 대구지역위원회 회장, 펜클럽 한국본부 심의위원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남지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 평가를 받아 온 박곤걸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 서늘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한걸음 물러난 은일(隱逸)의 정감을 고스란히 맛보는 묘미가 있습니다. 바람과 소나무, 그리고 푸른 산을 소재로 삼아 이런 시를 읊을 수 있는 시인의 내공이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시집에 실린 글에서 윤강로 시인은 '박곤걸의 시를 읽으면 느리게 호흡하는 시의 기교가 마음의 안식이 된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람 부는 날, 시인은 세차게 흔들리는 소나무를 보면서 그저 바람에 이리저리 정처 없이 휘둘리는 겉 형상만 본 게 아니라 ‘하늘에다 온 몸으로 수화하는/ 나무의 설법’하는 속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바람에도 불편해 하면서 세 치 혀로 온갖 불평을 늘어놓았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 듯합니다. 시인은 이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바람을 다스리지 못하겠거든/ 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만나/ 말 대신 귀를 열어라’고 말입니다. 입보다는 귀를 열고 바람 소리를 들어보라고 속삭이는 시어들이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시인은 아예 한 그루 잘 늙은 소나무가 손짓해 주는 ‘그 곁에 가서 뿌리를 내리라’고까지 말합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정(靜).중(中). 동(動)으로 성장하여 산과 닮을 정도로 자리를 잡게 되면, 그제야 지나가는 바람도 솔잎에 찔려 피를 흘릴 정도가 된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가 찬 결말을 노래한 시인지요!

파를 이겨낸 솔잎, 그리고 그 솔잎에 바람마저 피를 흘리는 경지가 도대체 어떤 경지일까요. 몇 년 전 개봉 되었던 영화,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라는 마지막 대사로 유명했던 영화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최종 병기 활>이라는 제목의, 조선 최고의 궁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지요. 세상살이에서 그저 운명적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바람’이 아니라, 그 바람을 극복하는 불굴의 의지와 강인함, 그리고 통쾌한 복수를 은유적으로 잘 표현해 냈기 때문에 천만 관객에는 약간 못 미쳤지만 꽤 흥행했던 수작의 영화였습니다. 아마도 그 영화의 주인공의 모습이, 오늘 감상하는 시에서 노래하는 ‘소나무’의 이미지를 닮았다고나 할까요.

쯤에서 시인이 태어난 고향 마을인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를 노래한 시 한 편을 더 감상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세상살이 아픔을 삭이고 침묵의 수행으로 온갖 헛생각 다 거두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싶었던 시인의 마음이 듬뿍 스며있는 시입니다. 그는 이런 다짐으로 삶을 살아내다가 2008년 12월 21일, 아쉬운 나이인 73세에 유명을 달리하였으며 선영인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 안장되었습니다. - 석전(碩田)

화천리 무지개

                          - 박곤걸

안개가 맨발로 마당에 들고
그 산골에 도라지꽃 같은 순정이 있다
가슴에 오래 뿌리내린
속마음 꽃보다 더한 향기로 웃음이 피어있다.
인연의 끈으로 풀리지 않는
눈빛으로 열은 따슨 가슴
그 마음이 체온보다 따스하다
세상살이 아픔을 삭이고
뼈있는 말, 피 같은 말 한마디
목숨 그것을
다 바쳐서 사랑이라 했으니
침묵 그것을
다 모아서 말씀이라 했으니
푸른 하늘도 내려와 베푸는
그 뜨락에 노래하는
새소리 내다보며 그 많은 헛생각을 다 거둔다

- 시집, <화천리 무지개>(혜화당,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