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아카이브 - 황인찬

석전碩田,제임스 2021. 6. 30. 06:44

아카이브

                              - 황인찬 
 
이 계단을 오르면 집에 이른다 
제비들이 창턱에 앉아 뭐라 떠들고 있다
그것이 여름이다 
장미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을 알고
무궁화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인 줄을 알고 
벌써 여름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난여름에도 똑같은 말과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이 알아차림을 평생 반복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순간마다 여름은 창턱을 떠나 날아갈 준비를 한다 
이 계단은 집을 벗어난다 
여름이 무리 지어 날아다니고 여름이 이리저리 피어 있는 풍경이다
낮은 풀들이 한쪽으로 밟혀 누워 있다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이 누적 없는 반복을 삶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이 시의 서정적 일면이다
 
-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창비, 2019) 

* 감상 : 황인찬 시인.

1988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10년 약관 스물 두 살의 나이에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집 <구관조 씻기기>(민음사, 2012)로 최연소 김수영 문학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첫 번째 시집이 무려 1만 7천부가 팔릴 정도였는데, 3년 뒤 상재한 두 번 째 시집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 역시 1만 7천부가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습니다. 대개의 시집이 초판을 찍고 마는데 이에 비교하면 엄청난 주목을 받은 셈입니다. 2019년 3월,  군에서 제대한 그가 세 번 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창비, 2019)를 내면서 다시 독자에게로 돌아왔으며 현재 ‘는’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카이브(Archive)’라는 말은 역사적 가치나 장기 보존의 가치를 지닌 문서 혹은 기록의 컬렉션(Collection)을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이런 ‘문서나 기록을 보관하는 장소, 시설, 기관’을 말하기도 합니다. 책과 기록물, 문서 등을 보관하는 도서관은 이러한 기능을 하는 대표적인 아카이브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대학 교학과에 근무할 당시, 홍익대학교의 미술대학 설립 60주년을 맞는 행사인 ‘2009 Hongik Art Design Festival’을 기획하고 그 엄청난 모든 실무를 진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다양한 행사의 일환으로 [Art Digital Archive(ADA)]라는 명칭의 공간을 하나 새로 마련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각 학과에서 필요로 하는 기자재나 슬라이드 작품 등을 대여하는 역할을 했던 ‘자료실’을 확대 개편하여 그저 자료를 빌려주고 받는 소극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11개 미술대학 소속 학과와 미술관련 대학원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졸업전시회 작품 자료 등을 체계적으로 확보하고 정리하여 보관하자는 취지였습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생산되는 자료들을 매년 잘 수집하기만 해도 세월이 가면 엄청난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기획했던 프로젝트였습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새로운 자료를 생산하고 그것을 잘 보관하여 후대에 전할 뿐 아니라, 필요할 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바로 ‘아카이브’라는 말 속에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확대 개편되어 자료를 모은 지 올해로 벌써 12년이 지났으니 미술대학의 부속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ADA]의 자료가 지금쯤은 엄청나게 많이 확보되어 있을 것입니다. 차곡차곡 쌓여나가는 자료가 결국은 보물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의 제목이 흥미롭게도 ‘아카이브’입니다. 시인은 시의 제목과 이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반복과 되풀이, 그리고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일상을 이야기합니다. 어느 여름 날, 집을 향해 나 있는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다가 해마다 평범한 생각들을 반복 되풀이하고 있는 자신의 ‘삶’과도 너무나 닮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데서부터 시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장미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을 알고/ 무궁화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인 줄 알고/ 벌써 여름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난 여름에도 똑같은 말과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이 알아차림을 평생 반복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문장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인은 의도적으로 ‘반복’의 묘미를 즐기고 있습니다. ‘장미가 피는 것을 보며’와 ‘무궁화를 피는 것을 보며’는 ‘그렇게 말하는 순간’과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과 더불어 모두 동어반복이라는 착각을 갖게 하는 장치들입니다. 창턱을 벗어나 창공으로 눈을 돌리면 무수히 날아다니는, 여름을 상징하는 제비들의 반복적인 움직임, 그리고 들판에 한쪽으로 밟혀 누워있는 파란 잔디들 또한 매년 반복되는 여름 풍경 중의 하나일 뿐,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여름인 내년에도 똑같이 반복될 것입니다. 

‘Ritual’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상의 반복’ 쯤으로 번역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저자인 메이슨 커리(Mason Currey)는 어느 날 문득 ‘일상’과 ‘창조’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루라는 동일한 시간이 주어졌는데, 어떤 이유에서 어떤 사람은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더 창조적이고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누구는 각본을 쓰고, 오페라를 지휘하고, 풍경을 그리는 시간에 왜 나는 빨래하는 시간조차 겨우 낼 수 있는 것일까?’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들은 특별한 습관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우리보다 더 효율적이고, 더 주도적이며, 더 훈련된 무언가를 갖고 있는 것일까?’ 

 때부터 그는 역사적으로 창조적인 재능을 발휘한 400여명의 소설가, 작가, 화가, 무용가, 극작가, 시인, 철학자, 조각가, 영화감독, 과학자 등의 하루를 정리한 ‘일상의 습관들(Daily Routine)’이라는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년 뒤, 그 결과물로 <Daily Rituals>(일상의 리투얼)이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을 출간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창조적인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하루를 보내는 자신만의 독특한 Ritual(의례나 의식, 습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반복’이 그저 되풀이되는 행동이 아니라 창조적인 활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만의 의식이나 습관을 반복하면서 생각의 에너지를 모으는 행동이 반드시 있었다는 발견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반복 자체가 더 높은 정신세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에너지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직까지 기억이 되는 이런 Ritual 실천 중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2,30년 전의 일이라고 기억이 됩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침에 일어나서 매일 하는 조깅을 거르지 않고 '한국에서도 미군들과 함께 조깅을 하고 있는 장면'이라면서 그 당시 신문과 TV가 대서특필했던 기사가 그것입니다. 이미 그 대통령은 어디를 가든 자신만의 일상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했던 Ritual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이벤트가 있어야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또 유명세를 타는 관광지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몰리는 현상, 어쩌면 잔잔한 일상의 반복이 더 값진 보배임을, 즉 Ritual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수준 낮은 부화뇌동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시는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바로 이맘때를 노래하고 있는 ‘여름날의 단상(斷想)’입니다. 시인도 그저 ‘서정적인 일면’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그저 단상으로만 끝나는 의미 없는 노래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을 ‘아카이브’로 달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평범한 여름날의 일상을 소재로 반복되는 평범함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디에 있든, 또 무엇을 하든 자신만의 독특한 Ritual을 통한 탄탄한 내공이 차곡차곡 쌓여지는 '아카이브'를 구축해나가야 할 일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