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시인들을 위한 동화 - 한명희

석전碩田,제임스 2021. 4. 28. 06:46

시인들을 위한 동화

 

                                - 한명희

 

아주아주 옛날에는 사람들이 몸으로 글을 썼어요 고호가 귀를 잘라 그림을 그린 것처럼요 사마천이란 사람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잘라 글을 썼답니다

 

세월이 흘러흘러 사람들은 도구를 이용하게 되었어요 예세닌은 손목의 동맥을 절단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나온 피를 펜에 찍었답니다 그가 쓴 시들은 비린내가 났지요

 

또 시간이 흘러 글쟁이들은 작업실을 갖게 되었답니다 보들레르는 창녀이자 애인의 방에서 트라클은 여동생이자 애인의 방에서 포는 사촌 여동생이자 아내의 방에서 작업을 했어요 아주 격정적인 작업이었지요

 

그리고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쟁과 내전, 불신과 검문, 폭력과 폭식, 기상이변에 광주민중항쟁 힌두쿠시 산맥 남쪽에서는 테러가 일어났고 애플은 아이패드를 내놓았지요 두바이유는 자주 백 달러에 육박했어요

 

요즘은 멀티태스킹이 대세입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하면서 글을 써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글을 써요 짜깁기를 하면서 모자이크를 하면서 글을 써요 사람들이 점점 만능이 되어갑니다

 

- 계간 <시인시각> 2011년 봄호, 시집 <꽃뱀>(천년의 시작, 2018)

 

* 감상 : 한명희 시인.

1966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박사학위(현대시)를 받았습니다. 1992년 <시와 시학>에 ‘시집읽기’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시집읽기>(시와시학사, 1996), <두 번 쓸쓸한 전화>(천년의 시작, 2002), <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세계사, 2005), <꽃뱀>(천년의 시작, 2018) 등이 있습니다. 2003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하였으며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현재는 강원대학교 영상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에서 시인은 제대로 시를 쓰는 게 아득한 ‘동화’가 되어 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도대체 시대가 얼마나 변했으면 이런 시가 읽혀져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까요. 네 번째 연에서 시인이 말하는 ‘급격한 변화’에 새롭게 추가되어야 하는 변화라면 작년부터 온 인류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19’와 지금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혈 민주화 투쟁도 당연히 언급이 되어야겠지요.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 변화들 중 시인이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변화는, 글쓰기 아니 시를 쓰는 작가의 태도인 듯합니다. 그런 변화된 모습을 시인은 ‘사람들은 인터넷을 하면서 글을 쓴다‘고 젊잖게 표현했지만, 아마도 속내는 ’사람들‘ 대신에 자신을 포함한 ’시인들‘이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요즘 사람들이 글을 쓰는 태도를 표현하면서 ‘사람들이 점점 만능이 되어갑니다’라는 시인의 말이 만능이어서 좋다는 뜻보다는 시니컬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하고 강산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글쓰는 방식도 변하지 않을 도리는 없습니다. 아주 아주 옛날, 시인들의 동화에나 등장하는 시대에는 ‘제대로 된 글쓰기’란, 곧 삶 자체였고 그 삶이 반영된 것이 그의 예술이었으며 그의 글이었습니다.

 

를 잘라 매춘부 라셀에게 선물했다는 반 고흐, 양심과 정의를 변호하다가 남근이 잘린 사마천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또 시간은 흘러, 도구를 이용한 예술 행위가 성행할 때 이사도라 덩컨과의 달콤했으나 불행했던 짧은 결혼생활 뒤에 결국 신경쇠약에 걸려 손목을 그은 예세닌, 그리고 그 피를 펜에 찍어 글을 쓴 시들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고 시인은 능청을 떱니다. 또 시간은 흘러 흘러 시대가 변하자, 자신의 작업실을 갖춘 전문 예술가들이 나타났습니다. 보들레르, 트라클, 에드거 앨런 포가 각자의 연인들이 있는 공간을 작업실 삼아 글쓰기에 푹 빠졌습니다.

 

대는 변했지만 그들에게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으니, ‘치열한 삶을 통한 글쓰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해서 글쓰기는 하나의 기능이 되었고, 그저 이곳저곳에서 베껴와 짜깁기를 잘 하면 되는 멀티태스킹의 한 가지가 되었으니 참담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디카시’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2016년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사전에 정식으로 등록된 이 말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장르로, 자연이나 사물을 포착한 영상(사진)과 5행 이내의 문자가 어우러진 시를 뜻 한다’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주변에서 찍은 사진 한 장과 그 사진을 보고 느끼는 서정을 짧은 글로 표현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핸드폰에 장착된 카메라가 고급화 되고 또 SNS의 발달로 디지털로 소통하는 시대로 변하면서 '1인 미디어'를 선호하는 세대와 만나며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문학 장르입니다. 처음 이런 류의 시가 나올 때 ‘시를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면서 전통 문학계에서는 썰렁한 반응이었지만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디카시 공모전’이 열릴 정도로 일반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전통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사색의 깊이도 없고 그 짤막한 단편적인 감상적인 글이 너무도 왜소해 보이며 초라해보였음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오늘 감상하는 시의 시인과 같이, 이제는 전통적인 시는 아득한 옛날의 ‘동화’ 쯤으로 인식될 위기의식도 예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2018년에는 ‘디카시’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하니 시대가 변하긴 변했나 봅니다.

 

이 쯤에서 디카시 하나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제1회 디카시 작품상을 탄 작품입니다.  이 시와 함께 보여주는 디카로 찍은 사진이 함께 있어야 완성되는 시입니다.

인이 직접 사진을 찍고, 그에 대한 서정을 토해낸 것입니다. 이 사진과 이 짧은 글을 읽고 지금은 얼굴을 볼 수 없는 부모님을 떠올리는 독자가 많을 것입니다. 어느 시인은 공광규 시인의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댓글로 해설했습니다. ‘몸빼라는 말조차 예쁜 건, 저 유치찬란한 꽃 무뉘가 아름다운 건 순전히 어머니가 상기시켜 준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렇듯, 이 시대는 한 권의 시집이 출판되기를 기다리기 전에 매일매일 SNS에 즉흥적으로 올라오는 사진과 시, 그리고 짧은 글들에 대해 순간순간 소통하는 것이 더 소중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멀티태스킹이 대세라는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알파벳 기준으로 140자 이내의 짧은 글만 가능한 ‘트위트’에 올라 온 글들을 그대로 내려 받아 그것을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을까요. 몇 년 전, 고(故) 황현산 교수가 작고한 후, 그가 트위트에 올렸던 단문들을 모아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제목으로 유고집이 나왔습니다. 즉흥적 멀티태스킹 현장의 한 가운데서, 나름대로 클래식한 자세로 '반듯한 글쓰기'를 주장하며 외롭게 분투했던 한 평론가의 고뇌와 노력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걸작의 책입니다. 시간 되실 때 일독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런 만능인 시대에서 살아 남으려면 옛 동화를 읽고 공부하여 감상하되, 그건 오래전 동화일 뿐이고 그저 즉흥적으로 임기응변에 능하기만 하면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저도 어쩔 수 없이 ‘시인들의 동화’를 읽어야 할 영락없는, 그래서 ‘모르는 게 참 많은’ 이 시대의 ‘꼰대’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