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가덕도 탕수구미 시거리 상향 - 박형권

석전碩田,제임스 2021. 4. 7. 06:58

가덕도 탕수구미 시거리 상향

                                                 - 박형권

달이 뜨지 않는 그믐밤이면 바다는 스스로 밝다
파도에 뛰어든 뿌연 인광이 항구의 앙가슴처럼 스스스 무너진다
아직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순결한 밤일수록 더욱 빛난다
빛도 바다의 일부분인 것을 어부들은 안다
가덕도 사람들은 어두운 밤바다의 인광을 ‘시거리’라고 부른다
인도에서 흑조(黑潮)를 타고 온 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다의 인광은 바다의 말일 것이다
사실은 야광충이 내는 빛이지만 나는 여전히
말이 빛을 내는 거라고 믿는다
누구나 한번은 어휘가 많은 인생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말의 고향인 인도로 한번 놀러가고 싶었다
그 그믐밤 아버지는
나를 저어 탕수구미로 낚시를 갔다
칠흑 같은 바다가 노의 궤적을 그렸다
몰고씨이를 꿰고 바다에 넣자 바다가 몰고씨이의 궤적을 그렸다
그런 밤은 붕장어의 밤이다
섬광 같은 신호가 왔다 바다 밑이 외등을 켰다
꿈틀거리는 빛의 반란!
바다는 살아있는 빛을 모국어로 썼다
모두 몸으로 뒤채는 언어였다
그 사이 이 행성의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가덕도의 밤은 육지에서 꺼졌고 이제 시거리로 말하지 않는다
밥 묵었나? 하고 이웃을 빛나게 하지도 않는다
아름다운 말의 시대는 내가 시거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떠나가고 있었다
가덕도 탕수구미의 황홀한 말씀이시여······ 상향!

-시집 <가덕도 탕수구미 시거리 상향>(모악, 2017)

* 감상 : 박형권 시인.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가덕도에서 유년을 보냈습니다. 경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지방직 농업주사보로 1년 근무하다 그만두었습니다. 이후 미술학원을 운영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라디에이터공장, 애자공장, 바지락 양식장 등에서 노동을 했습니다. 2006년 <현대시학>에 시 ‘봄, 봄’이, 2013년 <한국안데르센상>에 장편 동화 ‘메타세쿼이아 숲으로’가 당선되면서 등단, 지금은 글쓰기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시집 <우두커니>(실천문학), <전당포는 항구다>(창비), <도축사 수첩>(시산맥), 장편동화 <돼지 오월이>(낮은산), <웃음공장>(현북스), <메타세쿼이아 숲으로>(현북스), <나무삼촌을 위하여>(현북스), 청소년 소설 <아버지의 알통>(푸른책들)을 펴냈습니다.

난 해, 김해 공항 대체지로 가덕도 신공항이 결정되고 환경영향 평가라든지 타당성조차도 하지 않는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이 여야가 합의하여 통과시키는 희한한 상황을 접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생각은 ‘가덕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망가지기 전에 그 풍경을 마음에 담아와야겠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생각은, 한 집단 내에서 그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각자가 다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함께 자신의 의사와 상반되는 결정을 내리는 데 동의한다는 ‘애빌린의 역설(Abilene paradox)’이라는 경영학에서 쓰이는 용어였습니다.

저, 애빌린의 역설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일화를 간단하게 소개해 보겠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였던 제리 하비(Jerry B. Harbey)는 어느 해 여름 방학, 텍사스 주 콜맨에 있는 처갓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방문한 그 날 오후에 그 가족은 선풍기 앞에서 한가롭게 도미노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장인이 53마일(85Km 정도의 거리) 떨어진 애빌린에 저녁 식사나 하러 가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요."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애빌린까지 운전해서 가려면 오래 걸리는데다가 이런 날씨에 차 안이 무척이나 더울 것, 그리고 이 상황에서 운전은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게 싫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인과 아내가 가고 싶어 하는데 자기가 싫다는 의사를 표현하면 처가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다음과 같이 우회적으로 대꾸를 했습니다.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장모님도 가고 싶어 하시면 나도 괜찮습니다" 장모님이 반대하면 자기는 장모님을 핑계 삼아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모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나도 가고 싶단다. 애빌린에 가본 지 꽤 오래되었거든."

국, 그 가족은 한 끼 식사를 위해서 애빌린을 향해서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는 차 안에서 그들은 더웠고, 오랜 시간 동안 먼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음식은 그들이 온 길만큼이나 좋지 않았고 그들은 지칠대로 지쳐서 형편없는 저녁 식사를 허겁지겁 먹고 4시간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제리 하비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사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 같네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자 장모가 자신은 사실 집에 있고 싶었지만 다른 세 사람이 애빌린에 가자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비 교수도 말했습니다. "저도 애빌린에 그렇게 가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갔을 뿐이거든요." 그러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전 당신 좋으라고 갔던 거예요. 이렇게 더운 날 바깥에 나가기를 원하면 미친거라구요." 그 이야기를 들은 장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단지 나는 가족들이 지루해하는 것 같아서 그냥 그 제안을 해 본 것 뿐 이었다.“고 말입니다.

하자면, 가족 중 누구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 애빌린에 가는 데 찬성했다는 사실에 난처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각자는 편안하게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즐기고 싶었던 그 행복한 시간은 결국 허둥지둥 애빌린에 갔다 오느라 이미 날아 가버린 후였던 것입니다.

일화를 바탕으로 하비 교수는 조직 갈등 등의 이론을 연구하는 교수답게 ‘애빌린의 역설’이라는 개념을 발표하는 논문을 썼고 그 논문이 여러 분야에서 재인용되고 또 더 연구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애빌린의 역설’이라는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덕도에 신공항을 건설하기로 여야가 합의해서 밀어붙이기식으로 결정한 선택이 먼 훗날에 ‘애빌린의 역설’과 같은 잘못된 선택이 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부산 시장 선거, 그리고 여.야가 민심을 얻으려는 정치적인 얄팍한 계산에 의해서 실제로는 원하지 않지만 결정하게 된 이런 엉거주춤한 선택이, 결국은 우리 후손이 누려야 하는 아름다운 금수강산만 망가뜨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잘못된 결정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는 말입니다.

제 저는 부산에 사는 친구 부부와 함께 가덕도 연대봉(煙坮峰)을 올랐습니다. 부산 금정산 생태 환경을 지키는 등 환경보호 일선에서 전문가가 다 된 친구의 설명을 들으며 둘러본 가덕도 일대의 주변 풍광은 그야말로 황홀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봄꽃과 막 피어나기 시작한 신록이 어우러진 가덕도와 거가대교의 풍경, 그리고 멀리 바다 위에 누워있는 거제도의 모습이 한 폭의 산수화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덕도 남쪽, 대항항과 대항새바지 마을 등이 자리잡고 있는 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할 운명이라고 하니, 연대봉을 오르면서 자꾸 그 쪽만 쳐다봐지게 되더군요. 훗날 ‘저 비행기 활주로가 있던 저 자리에는 산 봉우리와 해안선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말하면서 완전히 달라진 지형을 설명하고 있을 '누군가'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너무도 서글펐습니다.

덕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고 지금도 가덕도에서 시를 짓고 있는 오늘 감상하는 시를 노래한 박형권 시인은, 한식일 성묘차 고향에 갈 때 가덕도까지 들렀다가 와야겠다고 마음 먹은 후, 일부러 검색해서 찾은 시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덕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신공항 건설 소식을 듣고 적이 마음이 쓰였는데, 아름다운 가덕도에서 시를 건져올리는 시인이야 그 마음이 오죽하랴는 생각에서 가덕도와 관련된 시인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박형권 시인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늘 감상하는 이 시는 마치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언이라도 하듯 미리 알고 써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가덕도의 현재 상황’을 절묘하게 잘 표현한 시입니다. 이 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시거리’, '몰고씨이', '탕수구미'등 가덕도 사람들만의 ‘말’들입니다. 시거리는 “야광충이 내는 바다의 인광”을 뱃사람들이 부르는 말이고 몰고씨이는 갯지렁이를 가덕도 사람들이 부르는 말이지만, 시인은 그 ‘시거리’를 인도의 흑조를 타고 온 “바다의 말(言)”로 유추합니다. ‘바다의 빛’을 ‘바다의 말’로 유추해내는 시인의 상상력이 바로 이 시를 이끄는 시적 은유가 되어 시(時) 공(空)의 한계를 넘어 신화적으로 읽히게 하는 마술을 부립니다. 태초에 말이 있었고 그 말로 ‘빛이 있으라‘는 천지창조 이야기가 시작된 것처럼, 가덕도에는 밤 바다를 가득 채운 인광, ’시거리‘가 풍성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을 쓰는 사람도 없고 또 들리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시인이 간절하게 꿈 꾸는 말(어휘)이 풍부한 세상을 그는 가덕도에서의 유년의 경험 속에서 건져 올리고 있지만, 그 가덕도는 이제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마는 슬픈 섬으로 남게 될 위기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유세차(維歲次)’가 제문의 첫 문장 첫 단어로 관례적으로 사용되듯이, ‘상향(尙饗)’이라는 말은 제문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시인은 가덕도의 언어가 조금씩 잊혀져가는 것처럼 “아름다운 말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달이 뜨지 않는 그믐밤”, “아직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순결한 밤”에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며 “이웃을 빛나게” 했던 시대는 “시거리로 말하지 않”게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말이 사라짐으로써 삶이 피폐해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삶의 내밀한 고백을 더는 들을 수 없게 된 시대에 시인은 “황홀한 말씀”을 전해주던 “가덕도 탕수구미”의 죽음을 소환해내는 것입니다. 그 말들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시인은 아름다웠던 시절을 캄캄한 어둠 저편으로 떠나보내는 축문과도 같은 시를 노래했으니, 바로 오늘 감상하는 이 시입니다.

차 없어지게 될 봉우리와 섬 남쪽의 세 개 마을이 있는 땅은, 해군(국방부)이 소유하고 있는 국유지이다 보니 골치 아픈 토지 보상 문제가 없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라며 오로지 경제적인 논리로만 지금의 결정이 쉽게 된 건 아닌지 아쉽다고 귀뜸을 해 준 한 현지 주민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온통 오직 ‘경제 논리’만으로 결정되는 작금의 우리 상황이, 살아 있는 빛으로 모국어를 삼고 있는 바다도 죽이고, 또 어휘가 풍성한 인생을 한번쯤 살고 싶어하는 시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비극으로 치닫는 것 같아 못내 아쉬웠습니다.

을 오르면서 마음으로만 담아오기엔 너무 아쉬워 정신없이 카메라 셧터만 애꿋게 자꾸 눌러댔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