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病에게 / 別離 / 僧舞 - 조지훈

석전碩田,제임스 2021. 3. 31. 06:48

病에게

 

                                    -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生에의 집착과 미련未練은 없어도 이 생生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地獄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 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人生을 얘기해 보세그려.

 

- 1968년, 思想界 1월호

 

* 감상 : 조지훈 시인.

1920년 12월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며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39년 4월 <문장>지에 ‘고풍의상’이 처음 정지용 시인에 의해 추천 되었고 그해 11월 ‘승무’, 그리고 1940년 ‘봉황수’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하였습니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의 강사를 역임하기도 했을 정도로 불경과 당시(唐詩)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 분야에 탐닉하였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 안동 출신 김난희(金蘭姬)와 결혼하였습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6.25 전쟁 때에는 종군작가로 활약하기도 했는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내가다1968년 5월, 평소 앓고 있던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기관지 확장증 등 합병증으로 마흔 아홉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습니다.

 

지훈 시인의 삶과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되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코 이 땅의 역사적인 흐름과 별개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지훈은 조부인 조인석으로부터 어릴 적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한의학자 겸 제헌 국회의원이었던 부친 조헌영이 6.25 전쟁 때 납북되고 좌익 청년들이 집안에 들이닥쳐 난리를 치자 그 수치감에 조부가 자살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습니다. 명망가 집안에 태어났지만 일제 강점기, 그리고 광복과 곧 이어 터진 전쟁, 또 아버지의 납북과 조부의 자살 등은 그의 삶이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말해 줍니다. 그가 일찍이 불교에 천착하게 된 것도, 또 그의 시가 아픈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같이 하면서 고전적인 아름다운 미의 세계를 동경하는 특징을 보여 주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집으로는 <청록집>(을유문화사, 1946), <풀잎단장>(1952), <조지훈 시선>(1965),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등이 있고, 수상집으로 <창에 기대어>(1958), <시와 인생>(1959), <지조론>(1962), <돌의 미학>(1964) 등이 있습니다. 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시집 <청록집>을 간행하여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작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지난 해 11월부터 올해 3월 20일까지 고려대 박물관에서는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열었고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최초 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지훈시초(芝薰詩鈔)를 단행본으로 만들어 최초로 공개하였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그가 평소 지니고 있던 지병(持病)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편지글 형식을 빌어 담담하게 시로 노래한 것입니다. 지금이야 신약이 발달하여 고혈압이 그리 큰 병이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고혈압이 무서운 질병이었으니 나름 세심하게 관리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이런 병이 온 것에 대해 화도 내기도 하고 또 짜증도 났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깨달은 것은, ‘병’이 다름 아니라 ‘친구’요 ‘벗’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네가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라는 표현을 하기 까지 그가 겪어내야 했던 인내의 시간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단계까지 이르기 까지 지난(至難)했던 과정을 시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딜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어김없이 찾아 오는’ 우울한 친구였다고 병에 대해서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찾아와선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으로 시인의 귀에 속삭이는 말이 휴식을 권하기도 하고 또 나아가 ‘생의 경외’와 ‘허무’를 가르친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은 그간 병으로 참 많이도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나 봅니다. 그리고 그런 불청객 같은 친구인 병에게, 이젠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 큰 소리를 치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라는 표현에서 그 고통과 아픔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적도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결국 시인이 깨달은 것은, 그저 병이라는 친구와는 차 한 잔 마시며 ‘인생이 그러려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임을, 그리고 그 친구를 잠시 멀리 보내는 비결도 아는 경지가 되었습니다.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해 전의 일입니다. 노란 국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어느 가을 날, 아내의 고향인 경북 영주 이곳저곳을 둘러본 적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난 부모님 때문에 유년의 기억이 거의 없는 아내에게 옛 추억을 찾아 주고 싶어 제가 일부러 기획했던 특별한 ‘추억 여행’이었지요. 아내가 태어난 영주시 하망동과 그 동산 위에 있었던 작은 교회, 그리고 초등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걸어 다녔다는 방앗간이 있는 골목길 등을 여유를 가지고 두루 두루 걸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흔적들은 아직도 아련하게 있다면서 행복해 하던 아내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러다 인근에 관광지로 이름난 무섬 마을(문수면 수도리)을 방문했다가 그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는 조지훈의 시, ‘별리(別離)’를 만났습니다. 교과서에서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적(私的)인 이야기가 있는 공간과 그의 또 다른 시 작품들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이 여행이 계기가 되어 조지훈과 그의 아내 등 시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조지훈 시인으로서는 저와 마찬가지로 영주가 처갓집이었던 셈입니다. 아내를 처갓집에 남겨두고 서울로 공부하러 떠나면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는 ‘별리’라는 시는 차마 되바라지게 ‘이별(離別)’이라고 말하면 혹시 다시 못 만날까봐 ‘별리’라고 슬쩍 비튼 제목부터, 전형적인 경상도 선비의 그것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별리(別離)

 

                                   - 조지훈

 

푸른기와 이끼 낀 지붕너머로
나즉히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방울소리만 아련히
끊질듯 끊질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삼고 가옵신 님아

 

- <여원> (1956.5)

 

난 2월 말, 큰 아들 내외가 선물해 준 종합병원의 건강검진 티켓으로 평생 처음 요란스런 검진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약 2 주간을 기다리는 시간은 마치 고 3 수험생이 수능시험을 치른 후 성적표를 기다리는 기간과 같았습니다. 부분적으로 필요한 검진이야 그동안 수시로, 또는 격년으로 받아온 터였기에 크게 염려하진 않는다고 했지만, 막상 요란하게 준비하여 제대로 된 비싼 정밀 검진을 받고 나니 덜컥 겁이 났습니다. 혹시 큰 병이라도 발견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 말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저는 올해 스물 아홉입니다’라고 천연덕스럽게 늘 농담으로 말해 왔던 나였지만 이제 나이가 환갑을 넘기고 보니 건강을 염려하는 좀팽이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다행스럽게도 크게 염려할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관찰이 요한다’는 종합 소견의 준수한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제는 저보다 10여년 쯤 연배 되시는 한 선배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건강하죠? 난 가끔 몸이 힘들다는 소리를 듣지 못해서 혼나곤 합니다. 배 선생은 나처럼 그러지 않기를..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게 휴식을 주기를...공연한 걱정!!??] 이 문자를 받고, 제가 오늘 함께 감상할 시를 조지훈의 ‘병에게’로 선택한 것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지요. 나이가 들면 가만히 귀 기울여 몸의 소리를 듣는 것도 ‘삶의 지혜’라는 것을 말해 주는 선배의 조언이었습니다.

 

등학교를 졸업한 후, 참으로 오랜 만에 조지훈 시인의 시를 접하면서 당시 입이 달토록 외웠던 그의 대표 시 ‘승무’를 살짝 꺼내서 감상해 봅니다. 한글과 한자를 적절하게 섞어 우리 말의 어감과 리듬을 절묘하게 살린 이 시가 왜 명시인 줄 다시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병이라는 친구가 혹시 불쑥 얼굴을 내밀고 찾아오더라도, 시인이 노래했듯이 ‘차 한 잔 마시는 마음으로’ 그를 맞는 달관의 경지를 꿈꿔 봅니다.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라고 노래한 시인은 떠나고 없지만 그의 시는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게 끊이지 않는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갖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 2021년 이 봄을 조지훈 시인의 시와 함께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 석전(碩田)

 

승무(僧舞)

                                     -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 방울 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시집, <문장>(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