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죽고 난 뒤의 팬티 / '자바 자바' 셔츠 - 오규원

석전碩田,제임스 2021. 3. 10. 06:51

죽고 난 뒤의 팬티

                             - 오규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者)도 아닌 죽은 자(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시집, <이 땅에 씌여지는 서정시> (문학과지성사, 1981)

* 감상 : 오규원(吳圭原) 시인.

1941년 12월 경남 밀양시(삼랑진읍 용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규옥(圭沃)이며 호적상으로는 1944년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산 중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사범학교에 진학한 그는 졸업 후 터무니없는 어린 나이에 부산 사상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나 교장, 교감, 장학사 등과 부딪히는 등 어린(?) 교사로서 교육 현장에서는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교사가 된 이듬해 현직에 있으면서 동아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습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었고, 1968년 군입대하여 대구 군의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중 ‘몇 개의 현상’이 김현승 시인에 의해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1971),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문학과지성, 1981),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문학과 지성, 1987),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 1 ·2>(문장, 1979) 등과 시선집 <한 잎의 여자> 그리고 유고시집 <두두>가 있습니다. 그 밖의 저서로는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1971년 첫 시집이 나오던 해,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태평양화학 홍보실로 직장을 옮기면서 경기도 시흥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1979년 그 직장도 그만두고 출판사 <문장>을 차려 단행본 등을 내는 일을 하다가 1983년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전임교수 자리로 옮긴 후 2002년까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2007년 2월 2일, 향년 66 세로 타계하였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굳어진 형식 자체를 해체하고 시적 언어를 비틀어 써야만 직성이 풀렸던 오규원 시인의 초창기 시절의 시입니다. 당시 그는 ‘해체 또는 재구성’이라는 시의 기법에 몰입하여 그런 류의 시에 자신의 온 재능을 기울이던 시기여서 상품 광고, 텔레비전의 광고, 영화 광고, 상표, 상품 포장 안내문 등을 그대로 인용하는 시를 즐겨 썼습니다. 그의 이런 해체 시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오 시인은 “방법적 인용” 또는 “인용적 묘사”라고 말하면서 객기를 잔뜩 부리기도 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그의 시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한 편을 본보기로 읽어보고 지나가겠습니다. 야유와 노골적인 비꼼, 그리고 형식의 해체 등이 극명하게 드려나 보이는 이런 시들을 통해서 그는 물신주의로 가득찬 세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바 자바’ 셔츠

                          - 오규원

자아바, 자아바
쿵(발을 구른다)
고올라, 자바
짝짝(손뼉을 친다)
아무 놈이나
쿵, 짝짝

자아바, 자아바
쿵(발을 구른다)
고올라, 자바
짝짝(손뼉을 친다)

여기는 남대문 시장 오후의
난장이다 티를 파는 이씨는
리어카 위에 올라 육탁(肉鐸)을 친다
하루의 햇빛은 쿵 할 때마다 흩어지고
짝짝 손뼉에 악마구리처럼 몰려오고
여자들은 제각기 두 발로 와서
이(李)씨의 가랑이 밑에 허리를
구부린다 엘리제 카사미아 캐논 히포
아놀드 파마 새미나 마리안느를
두 손으로 잡는다 건방진 여자들
한 손으로 제 얼굴까지 바싹 끌어당긴다

상가의 건물은 금강(金剛)의 영혼으로
여자들의 어깨를 짚고
여자들은 우뚝 선 이(李)씨 무릎 아래 엎디어

자아바, 쿵
(잡는다)
고올라, 자바
짝짝
(골라 잡는다)
고올라, 고올라
(잽싸게 고른다)
자바자바
(끌어 당긴다)

여기는 서울의 난장이다
이(李)씨는 잡히는 대로 티를
구석으로 팽개친다

자바자바
그놈
골라 자바
그놈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문학과지성사, 1987)

늘 감상하는 시는 별도의 해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저 평범한 일상의 시어로 씌여져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시입니다. 시에서 표현한대로 죽고 난 뒤에 내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을 쓰는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대수롭게 넘길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스운 일이 가득한 세상이다보니 갑작스런 사고를 당해, 내 몸이 다른 사람에게 보일 때 어찌 보일까 신경을 쓰는 게 영 우스운 일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덤으로 읽었던 시에서도 보듯이 그가 사용하는 시어 하나 하나에는 의도와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인이 말한 ‘팬티’는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을 의미하는 시적 은유입니다. 즉 살았을 때에는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속이고 치장하여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죽고 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밝혀지는 부끄러움을 통칭해서 시인은 ‘팬티’라는 시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르는 세상을 살면서, 언제라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갑작스런 죽음이 왔을 때, 내가 살았던 모든 게 다른 사람에게 밝혀지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준비해야 한다고 신랄하게 일침을 던지는 시입니다.

래 전의 일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 큰 매형과 얘기를 나누다가 의외의 말을 하나 들었는데 그 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뚜렷하게 기억이 되는 말입니다. 그 당시 발톱 무좀이 심했던 매형은 장모님이 죽은 후 염을 하는 현장을 지켜보다가 느끼는 게 있어서 발톱 무좀을 완벽하게 치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장모의 발이 발톱 무좀으로 심하게 이지러져 있는 걸 보면서 대신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말인데,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당시에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오늘 감상하는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 ‘팬티’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런 시를 쓴 시인이 오규원 시인 말고도 여럿 있습니다. 그 중 이 시와 너무도 닮은 시적 은유를 가지고 씌여진 다른 시인의 시를 이즈음에서 한 번 꺼내서 감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손현숙 시인의 ‘팬티와 빤스’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팬티와 빤쓰

                                  - 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 계간 <애지> (2007년 여름호)

현숙 시인도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스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히 무장을 한다‘고 한 수 더 떠서 너스레를 떨었지만 결국 오규원 시인의 시적 은유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외출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팬티 색깔까지 신경을 쓰면서 철저하게 자신을 준비하는 일이 매일 반복되는 일이라니. 여자들의 이런 마음 자세가 처음에는 생소하게 다가온 게 사실이지만,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그래서 지금 현재를 떳떳하게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노래하기 위한 시적 은유로 받아들이는 순간, 멋진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교적 젊은 나이에 작고한 오규원 시인은 지금 강화도 전등사 501호 나무 아래에 잠들어 있습니다. 죽은 후 한 점 부끄럼 없이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으면서 매년 2월, 그의 기일을 기억하고 찾아 오는 문우(文友)들을 맞는 그는 높은 곳에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을까.

시를 감상한 후 정치 지도자들이나 사회의 리더들이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부끄러운 일들이 죽은 후에 다 드러나므로 평소에 잘해야 한다고, 손가락을 남들에게 돌리기도 하지만 오히려 나는 오늘 아침에 어떤 팬티를 입었는지 슬쩍 한번 점검해 보는 '자아 성찰'의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혹시 심술궂은 봄바람에 치마가 날려 아뿔싸 사람들에게 들키더라도 괜찮을 화려한 팬티라면 금상첨화겠구요.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