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어린 봄 / 씨팔! - 배한봉

석전碩田,제임스 2021. 3. 17. 06:44

어린 봄

                               - 배한봉 

                                                     
과수원 귀퉁이 밭 일구러 갔다가
그곳이 적멸보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햇빛의 말
바람의 말
진눈깨비의 말을 기억하는
쑥 냉이 씀바귀
구만 구천 어린 나한들이 뿜어내는
초록 향기 외엔 아무것도 없는
적멸보궁
땅 깊숙이 삽날을 박으면
흙에서도
이슬 머금은 젖비린내
달빛 머금은 젖비린내
내 발목을 감고
얼굴까지 올라와서는
훅! 목젖 적시는 봄비의 옹알이
과수원 가장자리 적멸보궁에 들어
나는 소란스런 침묵으로 뛰노는
어린 봄을 만났던 것입니다.

- 시집, <악기점>(세계사, 2004)

* 감상 : 배한봉 시인.

196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김소월과 정지용 시의 생태학적 연구>일 정도로 느지감치 다시 시작한 시업(詩業)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등학교에 다닐 당시 학생 잡지에서 공모하는 학생작품공모전에 소설과 시가 장원에 당선될 정도로 문학에 심취했던 문학 소년이었습니다. 그 후 서울 살이가 시작될 무렵 시인 박재삼을 우연히 만나면서 그의 관심이 소설에서 시로 바뀌었습니다. “니는 소설카마 시 쓰는 기 나을끼라.” 박재삼 시인의 이 말 한마디가 그로 하여금 시의 길에 접어들게 했다고 그는 어느 문학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박재삼 시인의 후배가 운영하던 <경인문예>라는 곳에 1984년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하는가 싶었지만 곧 그 문예지는 폐간되었고 배한봉 시인은 일간신문 신춘문예 관문의 최종심에서 늘 고배를 마시며 처절한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10여 년 간은 이렇다 할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스스로 시에 재능이 없다는 자책과 절망 때문에, 또 열심히 돈이나 벌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와 인연을 끊었다는 말이 정확할 듯 합니다. 그러다가 1998년 우여곡절 끝에 <현대시> 신인상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뒤늦게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이후 <현대시>, <문학사상> 등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黑鳥>(한국문연, 1998 – 개정판 <천년의 시작, 2003>), <우포늪 왁새>(시와시학사, 2002), <악기점>(세계사, 2004),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문학의전당, 2006), <주남지의 새들>(천년의 시작, 2017)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우포늪, 생명과 희망과 미래>(문학의 전당, 2009), <당신과 나의 숨결>(문학사상, 2013) 이 있습니다. 전업시인으로 활동하면서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경남 창녕군에 위치한 람사르 습지 우포늪에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우포늪 시생명제’를 주재 · 개최하는 등 생태문학 발전과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김달진창원문학상, 경남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3년에는 시 ‘복숭아를 솎으며’가 농림부 주최 <詩사랑 農사랑 - 아름다운 농촌시>로 선정되어 농림부장관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 ‘우포늪 왁새’는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되어 수능 고사에 출제되기도 하여 고등학생들의 필독 시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경희사이버대학교, 추계예술대학교 등에서 대학생들에게 문학과 글쓰기 등을 가르치면서 작가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딱 요즘에 감상하기에 너무도 알맞은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과수원 귀퉁이 밭 일구러 갔다가/ 그곳이 적멸보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라는 시를 이끄는 첫 문장이 심상치 않게 다가옵니다. 도대체 적멸보궁이 무엇이길래 시인은 시를 읽는 독자들이 당연히 알고 있듯이 ’그곳이 적멸보궁'이란 것을 알았다고 진술하는 것일까.

‘적멸보궁’이란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하였던 인도 마가다국 가야성 남쪽 보리수 아래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인데, 그 후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절을 ‘적멸보궁’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眞身)이 상주하고 있는 귀한 장소라는 의미로 불교에서는 그 신비성을 강조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우리나라에는 5 대 적멸보궁으로 경남 양산시의 통도사,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 적멸보궁, 강원도 영월군 법흥사,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의 봉정암, 그리고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의 정암사 등이 있습니다.

런데 시인은 그 ‘적멸보궁’이 자신이 경작하는 과수원의 한 쪽 귀퉁이에 있다고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온갖 소란스런 세상 중에도 소리없이 ‘햇빛의 말/ 바람의 말/ 진눈깨비의 말을 기억하는/ 쑥 냉이 씀바귀/ 구만 구천 어린 나한들이 뿜어내는/ 초록 향기 외엔 아무것도 없는’ 침묵으로 생명의 아우성을 뿜어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흙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는 ‘이슬 머금은 젖비린내/ 달빛 머금은 젖비린내/ 내 발 목을 감고/ 얼굴까지 올라와서는’ 옹알이가 되어 뛰노는 봄비의 모습이란 적멸보궁의 그 진짜 의미, '귀한 깨달음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저 의미 없이 부처의 진신이 모셔져 있다고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초록 향기만 가득한 ‘어린 봄’이 소란스런 침묵으로 뛰노는 과수원 가장자리가 바로 적멸보궁이라는 말입니다. 각종 봄 새싹이 아우성치며 올라오는 이곳이 적멸보궁이 아니겠느냐고 시인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이 약동하는 이 봄에 시인이 발견한 ‘적멸보궁’이 참으로 기발하고 멋지지 않으셔요? 위에서 말 한대로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궁이라는 곳도 따지고 보면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그 진신을 쪼개서 다른 절에 봉안하는 '꼼수'를 부린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태백산 정암사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고, 비슬산 용연사(龍淵寺)에도 사명대사가 통도사의 사리를 또 분장(分藏)하여 적멸보궁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난 주말에는 꽃 시장에 가서 올해 봄꽃 모종을 구입해 와 화분 갈이를 했습니다. 겨우내 우거져 있던 시든 꽃의 잔해를 걷어내고 새 봄꽃 모종을 심는 일은 매년 즐거운 작업 중의 하나입니다. 예년보다 한 달이나 앞당겨 훨씬 빨리 찾아온 봄이 얼마나 반가운지요. 아마도 새로 심겨진 화분의 꽃모종들이 흙냄새를 맡을 즈음에는, 각각의 화분마다 봄기운이 가득한 ‘적멸보궁‘이 될 것입니다. 그 땐 집 현관문을 드나들면서 수시로 그 적멸보궁에 들어 이 땅에서 혹세무민 하는 중생들을 위해서 대신 참회의 기도를 올려야겠습니다.

확천금을 위해 투기로 구입한 땅에 탐욕의 묘목을 심어놓고 ’적멸보궁‘이 되길 갈구하는 무리배들의 헛된 욕심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말입니다. 글을 맺기 전에 배 시인의 다른 시 한편을 덤으로 읽어보겠습니다. - 석전(碩田)

 

씨팔!

 

                                              - 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 시집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문학의 전당,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