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정호승

석전碩田,제임스 2021. 3. 3. 06:46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정호승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 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 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

* 감상 :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 즈음에 읽을 시 한 편을 찾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이라는 재미난 제목의 정호승 시인의 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지난 해 3월 첫째 주에 감상했던 시도 정호승 시인의 시였더군요. '벗에게 부탁함'이라는 시와 '다시 벗에게 부탁함'이라는 두 편의 시였는데,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은 링크해 둔 제 블로그에서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s://blog.daum.net/jamesbae/13410866


호승 시인의 시는 평범한 시어를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내는 시들이어서 누구나 편안하게 읽을 수 있지만, 읽고 나면 무엇으로 타격을 당한 듯한 강한 깨우침이 있는 묘미가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도 ‘김수환’이라는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큰 어른 한 분을 시에 등장시켜 절묘하게, 제대로된 신앙인이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는 시입니다.

‘김수환’ 개인이 아니라 일부러 ‘김수환 추기경’이라고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직명’을 함께 쓴 이유는, 교황이 될 수 있는 최고 서열, 즉 종교적으로 ‘최고 높은’ 위치를 나타내는 ‘은유적인 시어’라고 보면 될 듯합니다. 어제 내린 눈처럼, '푸짐하게 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슬그머니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 나와' 사람들이 사는 삶의 현장으로 가서 ‘일하는 손’이 된 이야기들을 줄기차게 나열합니다. 시인은 아마도 ‘구제를 하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서 ‘추기경 몰래 명동 성당을 빠져나와’라는 표현을 했을 것입니다.

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추기경의 손이’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 나오는 도입부에서부터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비둘기처럼 앉아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후반부까지, 그리고 도입부와 후반부 중간에 있는 부분 등 세 부분으로 나눠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손이 성당을 빠져 나왔다가 다시 명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역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가운데 열거한 수많은 선행들은 모두 김수환 추기경이 평생 살면서 실제로 하셨던 일들입니다.

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기도 하고, 무료 급식소에서 국과 밥을 퍼 주다가, 지하철을 타고 그곳에서 껌 파는 노파의 껌 통을 대신 들고 서 있기도 했던 인간 김수환. 사람들은 그런 ‘김수환’을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멍청하고 아둔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의미 보다는, 그에게 이 표현을 함으로써 친근한 이웃으로서의 향기를 찾으려는 마음에서 ‘바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 분은 가난하고 외롭고 아픈 사람들과 늘 함께하고자 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잘 하지 못했다는 참회에 가까운 말을 자주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 자신을 ‘난 바보야!’라고 하면서 아이처럼 웃으시는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는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종교의 벽을 뛰어넘을 줄 아는 분이었고, 나이와 신분, 학벌과 빈부격차의 차이를 넘어 누구나와도 함께 엉엉 울 줄 알며, 또 ‘늙은 환경 미화원들과 같이 눈길을 쓸 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지를 몸소 실천하고 보여 주면서 우리 사회 민주화 역사의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진정한 ‘바보’였습니다. 지난 달 2월 16일은 그가 우리 곁을 떠나 서울 역 돔 위의 비둘기로 자리잡은 지 12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마침 올 해 사순절이 막 시작하는 바로 그 날이었지요.

순절(四旬節)이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인 <부활절>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 있는 주일날을 뺀 40일간을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교회력(敎會曆) 상의 절기입니다. 모쪼록 말과 혀로만 지켜지는 ‘종교적인’ 사순절이 아니라, 오늘 감상하는 시에 나오는 ‘김수환 추기경’이 두루 두루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비둘기가 되어 지금도 그들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고 있듯, 하시라도 뻗을 수 있는 실제적인 ‘기도하는 손’이길 소망해 봅니다. 이 사순절 계절에....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