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봄
- 배한봉
과수원 귀퉁이 밭 일구러 갔다가
그곳이 적멸보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햇빛의 말
바람의 말
진눈깨비의 말을 기억하는
쑥 냉이 씀바귀
구만 구천 어린 나한들이 뿜어내는
초록 향기 외엔 아무것도 없는
적멸보궁
땅 깊숙이 삽날을 박으면
흙에서도
이슬 머금은 젖비린내
달빛 머금은 젖비린내
내 발목을 감고
얼굴까지 올라와서는
훅! 목젖 적시는 봄비의 옹알이
과수원 가장자리 적멸보궁에 들어
나는 소란스런 침묵으로 뛰노는
어린 봄을 만났던 것입니다.
- 시집, <악기점>(세계사, 2004)
* 감상 : 배한봉 시인.
196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김소월과 정지용 시의 생태학적 연구>일 정도로 느지감치 다시 시작한 시업(詩業)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학생 잡지에서 공모하는 학생작품공모전에 소설과 시가 장원에 당선될 정도로 문학에 심취했던 문학 소년이었습니다. 그 후 서울 살이가 시작될 무렵 시인 박재삼을 우연히 만나면서 그의 관심이 소설에서 시로 바뀌었습니다. “니는 소설카마 시 쓰는 기 나을끼라.” 박재삼 시인의 이 말 한마디가 그로 하여금 시의 길에 접어들게 했다고 그는 어느 문학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박재삼 시인의 후배가 운영하던 <경인문예>라는 곳에 1984년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하는가 싶었지만 곧 그 문예지는 폐간되었고 배한봉 시인은 일간신문 신춘문예 관문의 최종심에서 늘 고배를 마시며 처절한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10여 년 간은 이렇다 할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스스로 시에 재능이 없다는 자책과 절망 때문에, 또 열심히 돈이나 벌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와 인연을 끊었다는 말이 정확할 듯 합니다. 그러다가 1998년 우여곡절 끝에 <현대시> 신인상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뒤늦게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이후 <현대시>, <문학사상> 등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黑鳥>(한국문연, 1998 – 개정판 <천년의 시작, 2003>), <우포늪 왁새>(시와시학사, 2002), <악기점>(세계사, 2004),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문학의전당, 2006), <주남지의 새들>(천년의 시작, 2017)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우포늪, 생명과 희망과 미래>(문학의 전당, 2009), <당신과 나의 숨결>(문학사상, 2013) 이 있습니다. 전업시인으로 활동하면서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경남 창녕군에 위치한 람사르 습지 우포늪에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우포늪 시생명제’를 주재 · 개최하는 등 생태문학 발전과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김달진창원문학상, 경남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3년에는 시 ‘복숭아를 솎으며’가 농림부 주최 <詩사랑 農사랑 - 아름다운 농촌시>로 선정되어 농림부장관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 ‘우포늪 왁새’는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되어 수능 고사에 출제되기도 하여 고등학생들의 필독 시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경희사이버대학교, 추계예술대학교 등에서 대학생들에게 문학과 글쓰기 등을 가르치면서 작가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딱 요즘에 감상하기에 너무도 알맞은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과수원 귀퉁이 밭 일구러 갔다가/ 그곳이 적멸보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라는 시를 이끄는 첫 문장이 심상치 않게 다가옵니다. 도대체 적멸보궁이 무엇이길래 시인은 시를 읽는 독자들이 당연히 알고 있듯이 ’그곳이 적멸보궁'이란 것을 알았다고 진술하는 것일까.
‘적멸보궁’이란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하였던 인도 마가다국 가야성 남쪽 보리수 아래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인데, 그 후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절을 ‘적멸보궁’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眞身)이 상주하고 있는 귀한 장소라는 의미로 불교에서는 그 신비성을 강조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우리나라에는 5 대 적멸보궁으로 경남 양산시의 통도사,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 적멸보궁, 강원도 영월군 법흥사,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의 봉정암, 그리고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의 정암사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적멸보궁’이 자신이 경작하는 과수원의 한 쪽 귀퉁이에 있다고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온갖 소란스런 세상 중에도 소리없이 ‘햇빛의 말/ 바람의 말/ 진눈깨비의 말을 기억하는/ 쑥 냉이 씀바귀/ 구만 구천 어린 나한들이 뿜어내는/ 초록 향기 외엔 아무것도 없는’ 침묵으로 생명의 아우성을 뿜어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흙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는 ‘이슬 머금은 젖비린내/ 달빛 머금은 젖비린내/ 내 발 목을 감고/ 얼굴까지 올라와서는’ 옹알이가 되어 뛰노는 봄비의 모습이란 적멸보궁의 그 진짜 의미, '귀한 깨달음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저 의미 없이 부처의 진신이 모셔져 있다고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초록 향기만 가득한 ‘어린 봄’이 소란스런 침묵으로 뛰노는 과수원 가장자리가 바로 적멸보궁이라는 말입니다. 각종 봄 새싹이 아우성치며 올라오는 이곳이 적멸보궁이 아니겠느냐고 시인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약동하는 이 봄에 시인이 발견한 ‘적멸보궁’이 참으로 기발하고 멋지지 않으셔요? 위에서 말 한대로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궁이라는 곳도 따지고 보면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그 진신을 쪼개서 다른 절에 봉안하는 '꼼수'를 부린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태백산 정암사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고, 비슬산 용연사(龍淵寺)에도 사명대사가 통도사의 사리를 또 분장(分藏)하여 적멸보궁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말에는 꽃 시장에 가서 올해 봄꽃 모종을 구입해 와 화분 갈이를 했습니다. 겨우내 우거져 있던 시든 꽃의 잔해를 걷어내고 새 봄꽃 모종을 심는 일은 매년 즐거운 작업 중의 하나입니다. 예년보다 한 달이나 앞당겨 훨씬 빨리 찾아온 봄이 얼마나 반가운지요. 아마도 새로 심겨진 화분의 꽃모종들이 흙냄새를 맡을 즈음에는, 각각의 화분마다 봄기운이 가득한 ‘적멸보궁‘이 될 것입니다. 그 땐 집 현관문을 드나들면서 수시로 그 적멸보궁에 들어 이 땅에서 혹세무민 하는 중생들을 위해서 대신 참회의 기도를 올려야겠습니다.
일확천금을 위해 투기로 구입한 땅에 탐욕의 묘목을 심어놓고 ’적멸보궁‘이 되길 갈구하는 무리배들의 헛된 욕심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말입니다. 글을 맺기 전에 배 시인의 다른 시 한편을 덤으로 읽어보겠습니다. - 석전(碩田)
씨팔!
- 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 시집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문학의 전당,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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