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서울이라는 발굽 / 유리의 기술 - 정병근

석전碩田,제임스 2021. 3. 24. 07:13

서울이라는 발굽

                              - 정병근

고향에 가면
피에 겨운 어린 내가 있고
고향에 갔다 오면
나는 백 년 늙는다네
어째서 골목은
작아지는 일에만 몰두했는가
고향에 갔네
고향은 다 끝난 자세로
죽은 혈족들처럼 무뚝뚝하고
무엇이 지나갔는가
사나운 사내가 어깨를 치고 가는 거리에서
무슨 간판을 두리번거리는
나는 아무리 가도 때늦은 사람
부르는 목소리 하나도 없이
바삐 바삐 올라오는
나는 서울이라는 발굽을 가진 사람
가지 않고 올라오기만 하는 사람
영 글러먹은 사람

* 감상 : 정병근 시인.

1962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계간 <불교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2001년 <현대시학>에 ‘옻나무’外 9 편의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등단한 지 14년 만인 2002년, 불혹의 나이에 낸 첫 시집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천년의시작, 2002)을 비롯해서 <번개를 치다>(문학과지성사, 2005), <태양의 족보>(세계사, 2010), <눈과 도끼>(시작, 2020) 등의 시집이 있습니다. 제1회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칠 전 어느 일간신문 한 귀퉁이에 소개 된 정병근 시인의 이 시를 읽다가 마치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다 끝나갈 무렵, 고향을 떠나 서울로 혼자 유학(?)을 온 후 평생 서울말을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아직도 그 숙제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어쩔 수 없는 ‘경상도 보리 문디’입니다. 더구나 4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제는 스스로 서울 사람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계절이 바뀌는 길목마다 ‘고향앓이’를 심하게 하는 영락없는 촌놈이기도 하고요. 시 속의 화자가 표현했듯이 가끔 고향이라고 찾아가면 이내 그 날 다시 돌아와야 하는 ‘나는 서울이라는 발굽을 가진 사람’이 다 되었다고나 할까요.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고향을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찾지만 정작 ‘가지 않고 올라오기만 하는 사람/ 영 글러먹은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 이 시를 읽는 순간 마치 감전된 듯 공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릴 적 내가 살았던 마을의 길다랗고 큼직했던 골목, 그 곳에 줄을 그려놓고 ‘가생’을 하느라 하루 종일을 뛰어 놀아도 한없이 넓었던 그 길은 왜 그리도 좁고 짧아졌는지. 또 아름드리 오리나무들이 열병을 하듯 줄지어 서 있던 어마어마하게 컸던 국민학교 운동장은 왜 그리도 작아졌는지. 오뎅을 팔고 쫀득이, 오다마 사탕을 팔던 학교 앞 구멍가게는 온데간데 없고 왕복 2차선 신작로가 생겨 학교 건물은 더욱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고향이 그리워 올 해도 한식일 성묘를 핑계 삼아 다녀오려고 짧은 휴가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서울이라는 발굽을 가진 사람’은 고향에 가지도 않고 또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제, 고향에 있는 친구와 통화 중에 내가 고향을 찾을 때마다 늘 살갑게 맞아 주던 ‘고탄이’ 아지매께서 지난 겨울이 시작되기 전 요양원에 들어가셨다는 슬픈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쑥이며 냉이 등 봄나물이 몸에 좋다고 비닐 봉지 한 가득 뜯어 일부러 챙겨주시던 아지매였는데, 이제 그 혈족들이 하나 둘 돌아가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점점 없어져 갑니다. 고향에 갔지만 ‘고향은 다 끝난 자세로/ 죽은 혈족들처럼 무뚝뚝하고’ ‘고향에 갔다 오면/ 나는 백 년 늙는다’는 시인의 말이 딱 맞는 듯 합니다.

향이랍시고 가면 바삐 바삐 올라 올 생각만 하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사나운 사내가 어깨를 치고 가는 거리에서/ 무슨 간판을 두리번거리는/ 나는 아무리 가도 때늦은 사람/ 부르는 목소리 하나도 없이’ 삭막한 곳인데도 그것도 모르고 아직도 나는 ‘가지도 않고 올라오기만 하는/ 영 글러먹은 사람’이라는 말에 가슴이 찔립니다. 그리고 그런 영 글러 먹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서울이라는 딱딱한 발굽’부터 벗어 던져야 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 용기마저도 없으니 딱한 노릇입니다. 고향을 떠나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팍팍한 현대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혹시 잃어버리고 사는 건 없는지,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실랄한 자아성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쯤에서 그의 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시 하나를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이 시는 순수와 절대의 경지를 상징하는 ‘유리의 안쪽’과 흔적과 온갖 불순물로 가득 찬 ‘바깥 풍경’을 가르면서 시인이 지향하는 절대의 경지를 잘 보여주는 시라고 평가 받고 있는 시입니다. 모든 불순물을 제거한 채 사물의 세계를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유리야말로 시인이 지향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시입니다.

유리의 기술

                                   -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훤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 시집, <번개를 치다>(문학과지성, 2005)

해 한식일 성묘 때에는 ‘서울이라는 발굽’ 대신 ‘고향’ ‘옛집’ ‘어머니’ 등 아름다운 유년의 추억을 소환해 낼 수 있는 ‘근사한 신발’ 하나를 신고 내려가 볼 생각입니다. 영 글러 먹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내키면 발길 닿는 대로 여유를 가지고 고향 산천을 마음에 담고 올라와야겠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