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종후성(鍾後聲) / 물방울 무덤들 - 엄원태

석전碩田,제임스 2021. 2. 24. 06:48

종후성(鍾後聲)

                                    - 엄원태

鍾은 제 몸을 울려
저무는 한 해를 보내고
새날을 향해 장중한 소리를 퍼뜨렸다

종은 제 몸을 울려,
그러니까 저의 온몸을 진저리쳐 떨어댄 것이어서,
어둠속에
기 ㅡ 인
여운을 남겼다

그런 여운은 속이 빈 것들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여운은 오래 남는다
내 빈 가슴속에도 그것은 아직 남아 있다
찬바람에 몸을 맡겨 떨고 있는
버들개지의 보드라운 싹눈에도 그것은 남아 있다

오래 진저리쳐본 것들만이
그 여운의 미미한 떨림을, 소리 없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다

그 진저리침 끝에, 노랗고 새하얀 꽃망울들을 터뜨리는
개나리 목련의 봄날에 가서야
누군가는 아아, 하고 뒤늦게 그 소리를 듣는다

- 시집, <물방울 무덤>(창비, 2007)

* 감상 : 엄원태(본명 : 엄붕훈) 대학교수, 시인.

1955년 6월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학.석.박사)하였고 1990년 <문학과 사회>에 ‘나무는 왜 죽어도 쓰러지지 않는가’외 4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습니다. 1987년부터 무려 25년 동안 만성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세 번씩의 투석을 하였고 2013년 가족들의 장기 기증으로 큰 수술을 경험하였습니다. 대구 가톨릭대학교 환경정보학부에서 조경학을 가르쳤으며 2020년 8월 정년퇴임하였습니다.

집으로 <침엽수림에서>(민음사, 1991), <소읍에 대한 보고>(문학과 지성사, 1995), <물방울 무덤>(창비, 2007),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창비, 2013) 등이 있으며 1991년 대구 시인협회장상, 2007년 김달진문학상, 2013년 백석문학상, 발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원태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병마와 공존하며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삶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었다’고 토로했습니다. 25년 간의 긴 혈액 투석치료, 그리고 간과 신장을 모두 이식받는 큰 수술 등을 겪어서인지 그의 시에서는 긴 병고의 터널 속에서 소외되고 상실되었던 쓸씀함의 ‘서정’이 물씬 풍기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질긴 생의 원초적인 욕망의 끝에 매달린 허기와 목마름이 그를 시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가 아닌 조경학을 전공한 학자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생활인으로서, 고통의 길에서 그가 시인으로서 길어 올린 ‘생수 같은 인생의 아름다움’은 치유의 시가 되었고 자신에게는 희망의 멜로디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가 노래하는 시에서는 그 따뜻함의 정도가 남다릅니다. 겸손하게 ‘실존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제는 따뜻한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겠다는 결단이 곧 그에게는 시를 쓰는 원동력이요, 견디는 에너지였다는 말입니다. 병고를 겪지 않았더라면 그냥 스치고 지났을 인물과 사물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그의 시들에서 물씬 묻어나는 이유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도 바로 이런 시인을 이해하면서 읽어야 더욱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시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누구나 갖게되는 ‘인생의 무상’을 그는 더 절절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소리의 긴 여운을 들으면서, 온 몸을 진저리 치는 종이 마치 자신과 같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온 몸을 울려 소리를 내는 종소리의 깊은 여운에 자기 자신을 이입시켜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이 처연하게 다가옵니다. 기~인 세월이 긴 소리의 여운으로, 그리고 속이 빈 것들만 만들 수 있는 그 소리는 그 수많은 세월 성한 곳 한 곳 없이 생 살갗에 주사기를 꽂으면서, 이제는 앙상하게 비어버린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그는 생각한 것입니다.

리고 그의 시적 은유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겨울 찬 바람에 몸을 맡겨 떨고 있는 버들개지에까지 이르고 또 그 매서운 추위에서도 보드라운 싹눈을 간직한 버들개지가 누릴 봄날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 속에서도 그 ‘봄날‘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오래 진저리쳐 본 것들만이 진저리 치는 여운의 미미한 떨림과 소리없는 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아아, 그 깨달음의 활홀함이여.

은 시집의 표제작으로 실린 다른 시 하나를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이 시도 역시 시인이 겪어야했던 천형(天刑)과도 같은 병고를 이해해야 들리는 노래 소리입니다.

 

물방울 무덤들

                                - 엄원태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 장력처럼 널 만났다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 시집, <물방울 무덤>(창비, 2007)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 너는, 하면서 /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 저 안에 이미 알알이 /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표현에서 또 다른 시인의 자화상을 만나게 됩니다. 초롱초롱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보면서 ‘물방울 무덤’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도 서럽지만, 달려 있는 모습이 눈물이 글썽이는 모습으로 표현한,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아 그간의 외로움과 아픔이 전해지면서 더 애절합니다.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매일 매일의 급박했던 그동안 그의 삶은, 인간 삶이 고해(苦海)와 같다는 말이 아니고서는 시원하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란 개나리와 하얀 목련이 화사하게 필 3월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화려한 꽃들을 보고서야 그들이 매서운 한파 속에서 온 몸으로 진저리를 치면서 그 추위를 견뎌왔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시인처럼 그 미미한 떨림과 ‘소리 없는 소리’를 제 때에 듣기 위해 이 꽃샘추위가 다가기 전에, 내 속에 가득한 욕망을 비워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