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후성(鍾後聲)
- 엄원태
鍾은 제 몸을 울려
저무는 한 해를 보내고
새날을 향해 장중한 소리를 퍼뜨렸다
종은 제 몸을 울려,
그러니까 저의 온몸을 진저리쳐 떨어댄 것이어서,
어둠속에
기 ㅡ 인
여운을 남겼다
그런 여운은 속이 빈 것들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여운은 오래 남는다
내 빈 가슴속에도 그것은 아직 남아 있다
찬바람에 몸을 맡겨 떨고 있는
버들개지의 보드라운 싹눈에도 그것은 남아 있다
오래 진저리쳐본 것들만이
그 여운의 미미한 떨림을, 소리 없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다
그 진저리침 끝에, 노랗고 새하얀 꽃망울들을 터뜨리는
개나리 목련의 봄날에 가서야
누군가는 아아, 하고 뒤늦게 그 소리를 듣는다
- 시집, <물방울 무덤>(창비, 2007)
* 감상 : 엄원태(본명 : 엄붕훈) 대학교수, 시인.
1955년 6월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학.석.박사)하였고 1990년 <문학과 사회>에 ‘나무는 왜 죽어도 쓰러지지 않는가’외 4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습니다. 1987년부터 무려 25년 동안 만성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세 번씩의 투석을 하였고 2013년 가족들의 장기 기증으로 큰 수술을 경험하였습니다. 대구 가톨릭대학교 환경정보학부에서 조경학을 가르쳤으며 2020년 8월 정년퇴임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침엽수림에서>(민음사, 1991), <소읍에 대한 보고>(문학과 지성사, 1995), <물방울 무덤>(창비, 2007),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창비, 2013) 등이 있으며 1991년 대구 시인협회장상, 2007년 김달진문학상, 2013년 백석문학상, 발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엄원태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병마와 공존하며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삶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었다’고 토로했습니다. 25년 간의 긴 혈액 투석치료, 그리고 간과 신장을 모두 이식받는 큰 수술 등을 겪어서인지 그의 시에서는 긴 병고의 터널 속에서 소외되고 상실되었던 쓸씀함의 ‘서정’이 물씬 풍기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질긴 생의 원초적인 욕망의 끝에 매달린 허기와 목마름이 그를 시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시가 아닌 조경학을 전공한 학자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생활인으로서, 고통의 길에서 그가 시인으로서 길어 올린 ‘생수 같은 인생의 아름다움’은 치유의 시가 되었고 자신에게는 희망의 멜로디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가 노래하는 시에서는 그 따뜻함의 정도가 남다릅니다. 겸손하게 ‘실존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제는 따뜻한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겠다는 결단이 곧 그에게는 시를 쓰는 원동력이요, 견디는 에너지였다는 말입니다. 병고를 겪지 않았더라면 그냥 스치고 지났을 인물과 사물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그의 시들에서 물씬 묻어나는 이유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도 바로 이런 시인을 이해하면서 읽어야 더욱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시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누구나 갖게되는 ‘인생의 무상’을 그는 더 절절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소리의 긴 여운을 들으면서, 온 몸을 진저리 치는 종이 마치 자신과 같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온 몸을 울려 소리를 내는 종소리의 깊은 여운에 자기 자신을 이입시켜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이 처연하게 다가옵니다. 기~인 세월이 긴 소리의 여운으로, 그리고 속이 빈 것들만 만들 수 있는 그 소리는 그 수많은 세월 성한 곳 한 곳 없이 생 살갗에 주사기를 꽂으면서, 이제는 앙상하게 비어버린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그는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시적 은유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겨울 찬 바람에 몸을 맡겨 떨고 있는 버들개지에까지 이르고 또 그 매서운 추위에서도 보드라운 싹눈을 간직한 버들개지가 누릴 봄날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 속에서도 그 ‘봄날‘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오래 진저리쳐 본 것들만이 진저리 치는 여운의 미미한 떨림과 소리없는 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아아, 그 깨달음의 활홀함이여.
같은 시집의 표제작으로 실린 다른 시 하나를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이 시도 역시 시인이 겪어야했던 천형(天刑)과도 같은 병고를 이해해야 들리는 노래 소리입니다.
물방울 무덤들
- 엄원태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 장력처럼 널 만났다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 시집, <물방울 무덤>(창비, 2007)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 너는, 하면서 /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 저 안에 이미 알알이 /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표현에서 또 다른 시인의 자화상을 만나게 됩니다. 초롱초롱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보면서 ‘물방울 무덤’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도 서럽지만, 달려 있는 모습이 눈물이 글썽이는 모습으로 표현한,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아 그간의 외로움과 아픔이 전해지면서 더 애절합니다.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매일 매일의 급박했던 그동안 그의 삶은, 인간 삶이 고해(苦海)와 같다는 말이 아니고서는 시원하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노란 개나리와 하얀 목련이 화사하게 필 3월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화려한 꽃들을 보고서야 그들이 매서운 한파 속에서 온 몸으로 진저리를 치면서 그 추위를 견뎌왔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시인처럼 그 미미한 떨림과 ‘소리 없는 소리’를 제 때에 듣기 위해 이 꽃샘추위가 다가기 전에, 내 속에 가득한 욕망을 비워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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