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첫마음 /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석전碩田,제임스 2021. 2. 10. 06:52

첫마음 

 - 정채봉

1월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내 일생이었지>(현대문학, 2000)

* 감상 : 정채봉 수필가, 시인, 동화작가.

1946년 11월 전남 순천 해룡면에서 태어났으며 광양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서 ‘꽃다발’이 당선되었습니다. 2001년 1월, 향년 54세의 일기로 작고하였으며 그의 사후 10 년째인 2011년, 대한민국의 성인동화 장르를 개척한 작가로 인정받으며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정채봉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부터 2001년까지 <샘터>를 발행하는 샘터사의 편집자로 일했습니다. 3살 때 어머니는 그와 그의 여동생을 낳은 후 20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5살 때 아버지는 일본으로 이주한 후 소식이 끊겨 할머니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주요 동화작품으로는 <물에서 나온 새>(샘터, 2006), <오세암>(파랑새어린이, 2003), <스무살 어머니>, <생각하는 동화>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첫 시집이며 유일한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내 일생이었지>(현대문학, 2000)가 있습니다.

'결손가정'에서 성장한 소년의 외로움이 그를 동심의 꿈과 행복, 평화를 노래하는 동화작가로 만들었습니다. 한창 공부에 재미를 붙이던 때 아버지로부터 보내오던 학비가 갑자기 끊기자, 아버지와 절연을 하면서 학업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놀고 있는 제자를 안타까이 여긴 중학교 은사의 도움으로 학비를 전액 면제 받을 수 있는 광양농고에 들어간 정채봉은 온실관리를 책임지면서 학업을 병행하였는데 농업학교의 교과목이 체질에 맞지 않아 힘들어 하던 중에 온실의 연탄난로를 꺼뜨려 관상식물이 얼어 죽게 만드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학교 도서실의 당번 일을 맡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그를 창작의 길로 인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서실에서 세계의 고전을 두루 섭렵한 그는 그 무렵 매일 주변의 친구들에게 편지 보내는 게 즐거움이었을 정도로 쓰는 걸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때 쓴 수 백 통의 편지가 그의 글쓰기 습작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2021년 1월은 정채봉 시인이 짧은 생을 마감한 지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샘터사>는 정채봉의 20주기를 맞아 그의 산문집 4권 중에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글들을 모아 <첫마음>이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출간했습니다. 오랜동안 그가 몸담아 온 샘터사의 편집인으로서 문학적 교류를 해 온 수많은 작가들 중, '형님-아우의 연'을 맺을 정도로 친했던 정호승 시인은 이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마음이 시리고 답답한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와 위안을 그의 글에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누구도 무엇이 옳은지 당신에게 말해 주지 못할 때, 해답도 없고 출구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을 때, 돌아가야 하겠지. 늦기 전에. 처음의 마음으로. 그의 동화를 읽고 사랑하는 독자들이 있는 한 그는 영원히 존재한다. 덴마크에 안데르센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정채봉이 있다.’

늘 감상하는 시 한 줄 한 줄, 자분자분한 그의 말투에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담백하고 간결한 언어로 수많은 독자의 마음을 다독였던 정채봉의 '첫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긴 시간을 두고 완성된 듯한 첫마음의 순간 순간들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요, 삶을 살아 온 시인의 자세이며,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에게 보내는 시인의 태도 그 자체임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마치 첫 마음을 노래하다가 시인이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갑자기 마무리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라는 마지막 문장 전이나 또는 그 다음에 꼭 뭔가 있어야 할 듯 한데 그냥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그런 느낌 말입니다. 시인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공백은 시를 읽는 독자들이 날마나 새롭게 각자의 첫마음을 하나씩 덧붙여 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채봉 시인의 작품들은 대부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녹아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유년 시절 결핍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작품의 자양분이라고나 할까요. 그의 시를 한 편만 달랑 읽기에는 아쉬움이 있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 하나를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오분
그래, 오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 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현대문학북스, 2000)

'엄마!/라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 놓은 세상 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목젖으로 울컥 서러운 눈물이 넘어가는 걸 느낍니다. 살아가면서 힘들고 외롭고 또 무서웠던 적이 어찌 딱 한 가지만 있었겠습니까만 시인은 그 중에서 딱 한 가지를 ‘엉엉 울면서’ 엄마에게 얘기하겠다고 노래합니다. 엄마가 살아계실 적, 젖가슴을 만지며 어리광을 부려 보았던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이 가고 또 사무치게 그리움이 몰려오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들었던 2020년을 보내고 2021년 설날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1년을 산다면’ ‘날마다 새로우며/ 날마다 깊어지며/ 날마다 넓어진다’는 시인의 첫 마음에 이제 소박한 소망을 덧붙여 나의 첫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신축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