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개천은 용의 홈타운 - 최정례

석전碩田,제임스 2021. 1. 20. 07:00

개천은 용의 홈 타운

                               - 최정례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 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대 놓치고, 그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히 선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억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 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 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창비, 2015)

* 감상 : 최정례 시인.

195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민음사, 1994), <햇빛 속에 호랑이>(아침달, 1999), <붉은 밭>(창비, 2001), <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사, 2006),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문지, 2011), <개천은 용의 홈타운>(창작과비평사, 2015), <빛그물>(창비, 2020.12) 등이 있습니다. 1999년 김달진문학상, 2003년 제10회 이수문학상, 2006년 제52회 현대문학상, 2012년 제14회 백석문학상, 2015년 제15회 미당문학상과 제8회 오장환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난 주말 모든 언론이 동시에 온통 그녀의 안타까운 별세 소식을 전했습니다.

[시인 최정례씨가 16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195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등단 30주년에 맞춰 지난해 펴낸 <빛그물>까지 모두 일곱 권의 시집을 냈다. 미국의 초현실주의 시인 제임스 테이트의 산문시집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를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간신문의 이 부음 기사를 읽자마자 곧바로 최정례 시인의 시를 꺼내 읽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지난 2015년 미당 문학상을 수상한 시집에 실린 대표작입니다. 그녀의 시에 대해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권혁웅ㆍ고형렬ㆍ김기택ㆍ이시영ㆍ황현산 등은 “한 이야기가 자유로운 연상을 타고 다른 이야기로 건너가고, 한 이미지가 변신담의 주인공처럼 모습을 바꾸면서 다른 이미지가 된다”며 “한 번에 여러 개의 삶을 사는 일이자 여러 개의 현재가 이곳에서 웅성거리고 있음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평했습니다.

정례 시인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시 공부를 위해서 대학원에 입학할 정도로 그칠 줄 모르는 꾸준한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시인은 산문이 어디까지 시가 될 수 있는지, 그 경계를 꾸준히 탐문한 산문시 작업으로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시를 두고 ‘이건 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은 어쩌면 독자를 우롱하고 가볍게 여기는 교만이 가득하다’ 등 엄청난 반대 목소리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녀가 어느 문학지와 인터뷰할 때 했던 말처럼, ‘전통적인 시 형식으로는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다는 게 분명한 이상, 그 현실에 안주할 이유가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산문시가 무엇인지 작품으로는 그 대답이 끝나지 않았지만 최 시인은 끊임없이 그 길을 탐구하기 위해서 달려왔습니다. 형식을 파괴함과 동시에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기 위해 고군분투 스스로를 들볶으면서 쉬지 못한 그녀는 엊그제 월요일 새벽, 그녀가 늘 바라던 대로 ’사랑으로 가득한 세계‘로 영원히 떠났습니다.

녀의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산문시를 통해서 기존의 틀을 비틀고 전통적인 가치를 뒤집음으로써 그로부터 얻으려고 하는 새로운 시각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개천은 용의 홈 타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속담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을 가지고 풀어간 시입니다. 아니 시라기 보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엇갈리게 들려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산문입니다. 개천은 용을 날개 없이 나는 힘을 주지만 정작 개천은 용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용이 떠나가도 섭섭해 하지도 않는 아이러니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연에서는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에 가고 있는 본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버스가 오지 않아 분노와 답답함을 느끼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엉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4연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즉 참새, 쥐, 모기, 벼룩 등을 없애기 위해 참새를 잡아들였지만 다른 해충들이 창궐해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시는 매연마다 다른 이야기가 존재하고 마치 이것은 다른 시들을 이어서 보는 듯합니다.

인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 시는 ‘개천에서 용 난다’와 같은 뻔하고 굳어 버린 관념이나 생각으로 시를 시작했지만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희망적인 순간을 말하기 보다는 아직까지 개천에 있어야만 하는 지독한 상황에 대한 분노를 말해주고, 마지막으로 참새, 쥐, 모기, 벼룩의 이야기를 통해 개천의 지독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이런 지독한 현실이 도리어 용이 되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시인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환상적이고 희망적인 상황을 통해 독자들을 현혹 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다음 연에서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 속에 있는 다른 이야기를 통해서 굳어져 버린 우리의 관념과 시각을 비틀고 있는 것, 바로 최정례 시인이 평생 실험적으로 시도하면서 탐색했던 시 세계입니다. 이쯤에서 그녀의 또 다른 산문시 하나를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남의 소 빌려 쓰기-송재학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

                                                            - 최정례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을 그냥 누워만 지낸다. 말 안 하고 일 안 하고 되새김만 한다. 소처럼 나는 나를 끌고 들판으로 나가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나가지도 못한다.

소는 내 것도 아니고 남의 소였어요, 밥값은 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소를 끌고 나간 것인데, 남의 소는 아이 말을 잘 안 들어요. 그냥 풀을 뜯어 먹어야 하는데 하늘만 쳐다봐요. 콧김만 뿜고 뿔을 들이밀어요. 소는 나보다 훨씬 더 컸어요.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건 오히려 나였고요, 화가 났어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돌을 집어 들었어요. 던졌어요. 소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어요. 설마 그 큰 소가 쓰러질 줄은 몰랐고. 어디에 맞았는지도 모르겠고.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도망갔어요. 무슨 일이냐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웅성거리는게 멀리서도 다 보였어요. 수의사가 불려왔더라구요. 그가 내린 판단은 소가 병들어 죽었다는 거에요. 그들은 땅을 파고 소를 묻었어요. 다음 날은 소를 다시 파내고 달려들어 살을 떼어갔어요. 소 값의 삼 분의 일이라도 건져야 한다고요. 한 열흘은 먹었나 봐요. 피범벅이 되도록 고기를 먹고 또 먹었어요.

이거 누구한테 말한 적 있어요? 아니요, 왜요? 난 말 못해요. 난 알고 있거든요 소를 죽인 건 바로 나라는 걸. 수십 년 전 일 아닌가요, 병들어 죽었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난 말 못해요. 소는 죽었고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데 그들이 날 가만 두겠냐고요.

- 시집, <빛그물>(창비, 2020.12)

치 단편 소설 하나를 읽은 듯한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이게 무슨 시야’하는 말이 금방이라도 나올 법 합니다. 최정례 시인은 평소에 자기 자신 뿐에게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곤 했습니다. ‘시는 어떤 상황이나 문제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눈뜨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형식도 과거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새로운 걸 시도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수십 년 전에 죽은 소의 진실을, 시간이 지났다고 감춰두고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모습이 어쩌면 굳어버린 생각과 시선을 바꾸지 않고 그럭저럭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 우리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화두를 던지는 듯 합니다.

실에 안주하거나, 시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한 여류 시인이 영원히 떠나는 날, 비록 빈소를 찾아 조문을 하진 못했지만 그녀의 시들을 읽는 것으로 이별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