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새해 아침 / 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석전碩田,제임스 2021. 1. 6. 05:36

새해 아침

                                     - 송수권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지난밤 제야의 종소리에 묻어둔 꿈도
아직 소원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외로웠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억울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슬펐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얼마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위에 우레와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그 위에 침묵과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
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
두 줄로 금긋듯
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
 
새해 아침은
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
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아놓으십시오
 
새해 아침은
첫날밤 시집온 신부가 아침나절에는
저 혼자서도 말문이 터서 콧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 시집, <꿈꾸는 섬> (문학과지성사, 1983)

* 감상 : 송수권 시인.

1940년 3월,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 학림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흥중학교와 순천사범학교,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습니다. 지난 2016년 4월, 폐암으로 향년 76세의 나이로 별세한 그는 겨레 고유의 정서를 친근한 리듬에 실어 노래한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쟁 전후 지리산 빨치산을 다룬 연작시집 <빨치산>, <달궁 아리랑>과 제주 4·3의 아픔을 노래한 서사시집 <신화를 삼킨 섬 흑룡만리>에서 보듯 그는 한국의 전통적 한의 정서와 역사와 현실의 아픔을 적절히 시에 녹여내는 작업으로 평생을 달려왔습니다.

제대 후인 1966년, 영주중학교 국어교사로 첫 교직을 시작하였고 그 후 나주중학교를 거쳐 땅끝 섬이라고 불리는 초도에 있는 초도중학교에 자원하여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영주중학교 시절 가르쳤던 제자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나이가 서른한 살 때였습니다. 6년 사이에 아이 셋을 낳았고 자녀 교육을 위해서 육지 근무를 신청하였지만 정작 발령 난 곳은 고향 근처 또다른 어느 섬이었습니다. 1973년, 그는 아내와는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사표를 내고 그 길로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이 선암사였고 그곳에서 남명 스님을 만나 중이 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남명 스님은 괴짜 승이어서 밤마다 막걸리를 한 되 이상 들이키고 닭 한 마리를 먹어야 잠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중이 되는 것도 쉽잖아 보여 몇 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가 선암사 절방에 있을 때 문학병이 도지기 시작해서 초안을 잡았던 글들이 그가 문단에 나올 때 데뷔작이 된 ‘山門에 기대어’외 몇 편의 시였습니다. 1975년, 문학사상사의 신인상으로 이 시가 당선되어 등단한 그는 1976년 다시 교사 시험에 응시, 합격한 후 지도라는 섬에 있는 지도중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에게는 ‘시인교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수권 시인의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 먼저 장황하게 그를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시어 하나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온 인생 이력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정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새로운 해를 맞으면서 새로운 다짐과 마음가짐을 노래하는 평범한 시입니다만 그의 삶을 이해 한 후 다시 읽으면 시어 하나하나에 회한이 묻어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린 시절 고흥 두원반도 앞바다와 학림 마을 뒤로 가득하게 서 있던 대나무 숲, 그리고 병약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먼저 가신 어머니, 또 어머니를 먼저 보낸 세 살 터울의 젖먹이 남동생이 힘들게 삶을 견뎌오다가 군 제대를 하고 난 이틀 후, 결국 스스로 음독자살하는 가슴 아픈 일, 그 6 개월 후 발령을 받아 첫 임지로 떠나야 했던 자신의 암울했던 상황 등, 배고프고 암울했던 시절은 고스란히 그의 그 이후 시편들에서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정서가 되고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에는 가난과 고독, 모정 결핍, 그리고 동생의 자살이 가져다 준 문학적 열병 등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래서 해마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더 간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군대 가기 전, 형을 위해서 날품팔이까지 했던 동생의 몫까지 살아 내야하는 부담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담을 덜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떠돌며 정착하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늘 새해가 되면 남들보다는 더 치열하게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첫 연에서부터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존칭명령어’는 아마도 지금은 저승에 있지만 늘 자신을 위해서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을 ‘동생’에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독백처럼 다짐하는 각오의 말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 ‘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아놓으십시오’ 등 그 시어들이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로웠습니까? 슬펐습니까? 억울했습니까?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얼마나 하고 싶었던 일이 많았습니까? 시인이 묻는 이 질문들을 소리 내서 따라 읽다보면 금방이라도 먼저 간 동생이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스러운 서러움의 눈물이 북받쳐 흐를 것 같습니다. ‘그 위에 하얀 눈이 내리게 하십시오’라고 반복되는 문장이 갑자기 ‘우레와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라는 대목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 시는 곧 바로 ‘침묵과 같은 눈으로 내리게 하고’ 또 ‘두 줄로 금 긋듯 아픈 추억을 지워내 달라’는 표현으로 ‘정화와 화해’로 한숨을 돌립니다. 올 한 해는 그런 마음으로 맞겠다는 시인의 담담한 각오입니다. 그리고 그 각오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 첫 날 밤 시집 온 신부를 등장시켜 ‘혼자서 콧노래를 부르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이 부분은 아마도 방랑끼많았던 자신 때문에 평생 세 아이와 남편을 뒷바라지 한 맨발의 아내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시인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그가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 시 ‘산문에 기대어’는 제1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에 투고한 시였는데, 당시 10여 편의 시를 원고지에 쓰지 않고 갱지에 썼다는 이유로 심사위원들이 휴지통에 버렸다가 우연히 다시 발견하는 바람에 ‘당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문학사상>의 주간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이란 표현을 하는 바람에 그 후 ‘휴지통 시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당선은 되었는데, 연락처가 없어 당선소감은 1년이 지난 1975년 2월에야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시가 이 시를 표절했다고 하여 취소되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송수권 시인의 주가가 한껏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이 쯤에서 그의 등단작 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섭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그리메: 그림자의 옛말

리고 이 시에 대한 송 시인 자신이 직접 쓴 소회가 이러합니다.

'山門. 그것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의 문이다. 윤회의 끝없음과 부활(환생)이다. 시력40여 년을 돌아보면 나의 첫 출발은 이 문을 하나 짊어지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엔 한 생명의 부활과 윤회가 끝없이 한(恨)의 가락을 이루고 있다.(중략) 일주문을 들어서다 말고 한 발은 일주문 안에 한 발은 일주문 밖에 두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것- 이승이 곧 저승이고 저승이 곧 이승인 불이문(不二門)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경계 허물기가 곧 山門이 아닐까. 이승과 저승을 뒤집어 놓는 체험 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상처가 없는 행복한 시쓰기로 시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중략) 이 시는 바람 부는 늦가을, 기러기가 공중에 길을 내는 것만 보아도 ‘누이’(자살한 남동생)의 선험적 이미지인 눈썹(동생은 숱이 짙은 눈썹이었음)의 행방을 보게 되고, 동생의 무덤을 찾아가 술 한 잔을 나란히 따라 놓고 그가 와서 나의 빈 잔을 채워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의 넋두리는 내가 살아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기다림의 넋풀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화체 형식의 독백 속엔 설움이 깊게 배에 있는 재생적 의지가 짙게 깔려 있다. 이는 곧 넋풀이로서의 해한(解限)이며 역동적인 생기로 피는 한의 극복의지이다.'

후, 송 시인의 삶은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섬을 떠돌던 그가 드디어 육지로 입성한 해가 1980년. 광주여고 교사로 발령 받은 두 달 후, 운명처럼 5.18이 터진 것입니다. 전남일보 복간을 축하하는 ‘젊은 광장에서’라는 시가 화근이 되어 결국 그는 서광여중, 효광여중 등으로 쫒겨나는 등 그 후 전담 형사가 그와 함께 출퇴근을 하는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1995년 사표를 던진 그는 제주도로 향합니다. 근원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떠돌이 병이 다시 도진 것도 그맘 때였습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제주도의 시인 집으로 가서 2 년여를 머물렀습니다. 이 때 <남도의 맛과 멋>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이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대학교 김창진 교수가 이 책의 서문에 실려 있는 글에 매료되어 [대학 교양국어] 책에 한 꼭지를 싣겠다고 연락을 하였고 강의도 하나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광주여자대학, 순천대학교 등에서 시간강사와 객원교수 등으로 강의를 맡게 되었고 2001년, 급기야는 석박사 학위는커녕 학사 학위증도 없던 그가 국립 순천대학교의 전임 교수로 특채되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언론이 대서특필 한 뉴스거리가 될 정도였습니다. 2005년 8월, 이 대학을 정년퇴임 하고 그 후에도 명예교수로 더 머무르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작품 활동을 하였으니 이 시기가 그의 인생에서는 최고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 아침을 노래한 시 한 편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한 시인의 삶 전체를 주마간산식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도 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열 차게 살다간 한 시인의 새해 아침 각오와 다짐을 통해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난 2010년 빨치산들을 인간적인 관점, 역사적인 관점, 그리고 민족의 관점으로 풀어낸 대서사시집 <달궁 아리랑>이 출간되었을 때 문학평론가 이형권이 송 시인에 대해서 쓴 글을 읽으면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송수권 시인은 그동안 서정성과 현실성을 고루 갖춘 작품을 창작해 온 남도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서정성에 치우치는 시는 대책 없는 순정이 되기 쉽고, 현실성에 치우친 시는 메마른 이념에 불과할 터, 송수권 시인은 둘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서정적 현실, 혹은 현실적 서정의 시학을 추구해왔다. <달궁 아리랑>도 그러한 조화의 시학이 도달한 큰 봉우리이다. 이 대작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송수권 시인이 사석에서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깜냥엔 한국문학 통일시대를 내다보면서 지리산 서사를 써 보았다네. <태백산맥>도 비껴간 지리산을 정면으로 도전해 본 것이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작품과 관련된 대가급 시인의 건강한 문학관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여 <달궁 아리랑>은 한국시가 잃어버렸던 가열찬 역사성, 혹은 오롯한 문학성의 귀환을 의미한다.’(충남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 석전(碩田)


p.s. : 송수권 시인의 프로필 정리

[수상]

1975년 문공부 예술상(광복30주년기념 민족장편서사시 부문)
1987년 전라남도 문화상
1988년 소월시문학상
1990년 국민훈장 목련장
1993년 서라벌 문학상
1996년 제 7회 김달진문학상, 광주문학상
1999년 제11회 정지용문학상
2003년 제1회 영랑시문학상
2005년 월간 김동리문학상
2008년 제1회 한민족문화예술대상. 지리산인산문학상
2010년 만해님시인상
2012년 제8회 김삿갓문학상
2013년 순천문학상, 구상문학상

[시비]

화엄사 경내 「시의 동산」에 ‘山門(산문)에 기대어’시비
전북 부안읍 매창공원(기생공원)에 ‘이매창의 무덤 앞에서’ 시비
해남군 땅끝 시비공원 시비.
충남 옥천 정지용문학관 공원 앞 수상 시비
강원 영월 김삿갓 문학공원에 김삿갓 문학상 수상 시비

[저서]

제 1시집 <산문에 기대어>(문학사상사)
제 2시집 <꿈꾸는 섬>(문학과 지성사)
제 3시집 <아도>(창작과 비평사)
제 4시집 동학혁명 서사시집, <새야새야 파랑새야>(나남)
산문집 <다시 산문에 기대어>(오상사)
제 5시집 <우리들의 땅>(문학사상사)
대표 시선집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문학사상사)
산문집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문학사상사)
역사 기행집 <남도 기행>(시민)
한국 현대시 100인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미래사)
제 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전원)
제 7시집 <별밤지기>(시와 시학사)
제 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문학사상사)
남도 음식문화 기행, <남도의 맛과 멋>(창공사)
산문집 <쪽빛세상>(토우)
제 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시와시학사)
우리 토속꽃 시집, <들꽃세상>(혜화당)
<태산 풍류와 섬진강>(토유)
제 10시집 <파천무>(문학과 경계사)
3인 시집 <별 아래 잠든 시인(송수권, 나태주, 이성선)>(문학상사)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모아드림)
자선시집 <여승>(모아드림)
<시인 송수권의 풍류 맛 기행>(고요아침)
산문집 <아내의 맨발>(고요아침)
제 11시집 <언 땅에 조선 매화 한 그루 심고>(시학사)
시집 <그대, 그리운 날의 시>(고요아침)
비평집 <사랑의 몸 시학>(문학과 경계사)
<송수권 시 깊이 읽기>(나남)
정년퇴임 기념문집 한국 대표시인 101시선집<송수권>(문학사상사)
시 감상집 <상상력의 깊이와 시 읽기의 즐거움>(푸른사상)
<시창작실기론>(문학사상사).
시선집 <시골길 또는 술통>(애지)
산문집 <소리, 가락을 품다>(열음사)
장편 동화 <옹달샘 꽃누름>(문학사상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집, <달궁아리랑>(종려나무, 2010)
제 13시집 <남도의 밤식탁>(작가, 2012)
제 14시집 <빨치산>(고요아침, 2012)
제 15시집 <퉁>(서정시학, 2013)
제 16시집 <사구시의 노래>(고요아침, 2013)
제 17시집 <허공에 거적을 펴다>(지혜, 2014)
제 18시집 서사시집, <신화를 삼킨 섬 흑룡만리>(지혜,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