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실어증 - 심보선

석전碩田,제임스 2020. 12. 16. 05:54

실어증

                                       - 심보선

나이가 들수록 어휘력이 줄어든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인접적 자의성의 규칙에 따라 평소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을 훈련 삼아 적어보았다

배짱, 베짱이
사슬, 사슴
측백나무, 측면
언니, 어금니
홈, 흠
마음껏, 힘껏
벨라, 지오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생각할 때 다른 단어들도 숙고했을 것이다

달, 해, 안개, 숲, 구름 ...... 같은 것들

버려진 단어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있다

시인이 아니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

TV에 나오는 낱말 맞히기 게임에서 하나도 맞히지 못했다

철없던 시절엔 실어증에 걸리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소원이 이루어졌다

약을 먹는데 옆집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어도 말이 안 나온다

-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사, 2017)

* 감상 : 심보선 시인, 사회학자, 대학교수.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했습니다. 대학 재학시엔 '대학신문' 사진기자로도 활동했습니다.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 2008),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 2011), <오늘은 잘 모르겠어>(문학과지성, 2017), 예술 비평집으로 <그을린 예술>(민음사, 2013)이 있습니다. 어빙 고프먼의 <수용소>(문학과지성, 2018)를 번역했고 김종삼시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21세기 전망’ 동인입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를 거져 현재는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론가들은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심보선을 ‘불행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긍정적 결말을 끌어낼 수 있는 언어를 찾아 풀어놓을 줄 아는 시인’으로 그를 소개합니다. 끊이지 않는 삶의 슬픔과 고통, 어둠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가운데 심보선은 슬픔 사이 찰나의 순간, 눈앞에 없는 것들의 존재를 포착해내는 데 탁월한 시인이라는 것입니다. 불행이 꼬리를 물며 따라 와도 우리가 서로에게 바통을 넘겨주듯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다면, 또 서로가 서로의 말에 닿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불행으로만 점철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어떤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은 시를 통해 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깨달은 한 순간을 포착한 것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그가 포착한 것은 무엇일까. 나이 들어가면서 적절한 단어가 순간순간 떠오르지 않는 증상이 심해져서 소위 학자들이 제안하는 방법인 ‘인접적 자의성의 규칙’에 따라 이런 저런 단어들을 연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연상되는 단어들은 온통 그저 일상의 삶에서 들은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일 뿐입니다. '윤동주'였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불후의 명작 시를 남길 때 비록 그 시에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달, 해, 안개, 숲, 구름’과 같은 영롱한 단어들을 숙고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버려진 단어들만 나열해도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도 있고 또 시인이 아닌데도 그러할진대 정작 ‘시인’이라고 하는 시 속의 화자인 자신은 왜 이럴까 하는 자조적인 순간을 포착한 것입니다. 철없던 시절에는 ‘실어증’에 걸리고 싶을 정도로 너무도 많은 아름다운 시어들이 넘쳐나서 주체를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TV에서 하는 낱말 맞히기 게임에서 하나도 맞히지 못할 정도이니 그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긴 하지만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어증’이란 뇌 안에서 언어 기능을 담당하는 부분의 기능적, 구조적 손상으로 말을 하고 이해하는 능력 자체가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시의 제목을 ‘실어증’이라 하기 보다는 오히려 ‘건망증’이 더 어울리는데 왜 굳이 ‘실어증’이라고 했을까. 이제 내 속에서 시어가 메말라버린 상태, 즉 그 상태가 건망증을 넘어 실어증이 되었으니 분명한 위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이 위기의 순간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어도 말이 안 나온다는 표현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위기의 모습이 극단의 상황에 도달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보선 시인의 시들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 난해함이 있지만 '생각할 거리', '느낄 거리'를 분명 제공해 줍니다. '긍정적인 자세로 삶에 임하라'는 알량한 훈계나 계몽이 아니라 '꽉 막힌 삶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약을 먹어 비록 아득하게 들리긴 하지만 '옆집의 문 여닫는 소리'는 아직도 들을 수 있다는 게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 절체 절명의 순간 용기를 내서 분명하게 ‘살려 달라’ 외치기만 하면 도움의 손길은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는 하고 싶은 말을 잃어버린 ‘실어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없는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냥 주저앉을 일이 아니라 열심히 평소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을 연상하는 연습을 해 볼 일입니다. 그 단어들 중,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던 ‘사랑한다’는 말이라면 더욱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도도히 흘러가는 삶의 황톳물에 떠내려가던 송장 하나가, 그 사랑한다는 말에 걸려 더 이상 떠내려가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