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 남진우

석전碩田,제임스 2020. 12. 30. 06:37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 남진우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날
낡은 수첩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나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 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 시집, <사랑의 어두운 저편>(창비, 2009)

 

* 감상 : 남진우 시인, 문학평론가, 대학교수.

1960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가 당선되었고,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서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1995년 동서문학상, 1998년 김달진문학상, 1999년 소천비평문학상, 2001년 현대문학상, 2002년 팔봉비평문학상, 2007년 대산문학상(시), 2014년 대산문학상(평론)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다>(민음사, 1990),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학과 지성사, 1997), <타오르는 책>(문학과지성사, 2000),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문학과 지성사, 2006), <사랑의 어두운 저편>(창비, 2009) 등이 있고, 여러 권의 비평집이 있습니다.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2004년부터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외딴방>, <엄마를 부탁해> 등 베스트셀러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신경숙과 지난 1999년 결혼하였고, 2015년 신경숙의 작품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면서 그동안 ‘표절 저격수’로 불려온 문학평론가인 그가 부인의 표절 문제에는 일언반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마음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써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며칠 전 어느 지인이 보내 온 코믹한 이모티 콘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I’M NOT ADDING THIS YEAR TO MY AGE. I DIDN’T USE IT.] 그러니까 '나는 올 한 해는 내 나이에 산입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올해는 내가 전혀 사용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난 2월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아직도 그칠 줄을 모르고, 심지어 영국에서 시작된 변종 바이러스의 확산세는 무섭게 전 세계로 새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암울하고 힘든 시기일 때 함께 읽을 시로 어떤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동갑내기 남진우 시인의 ‘언제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시를 선택했습니다.

 

음 속에 늘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마음 속에서 지우고 그 이별의 슬픈 마음을 정작 그 상대에게 조차도 말하지 못하고 시 속의 화자는 갖고 있는 수첩에만 자신의 마음을 혼자 쓰고 지우는 장면이 상상되어지는 시입니다. 한 때는 그(그녀)가 없었다면 살아갈 삶의 희망도 없었을 정도로, 온 마음을 가득 채웠던 존재였습니다.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절대로 헤어짐이나 잊혀짐이라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는 낡은 수첩 한 켠에 씌여 있는 그 문장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 넣습니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라고. ’너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제는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잊지 못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과거와 미래 시제를 넘다들면서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맛깔스런 표현이 절절합니다.

 

3년 전, 친구들이 모여 '2020년은 환갑을 맞는 특별한 해이니 함께 해외로 환갑 여행을 가자'고 의기투합을 했었지요. 그리고 가슴 부푼 바로 그 새해가 밝았고 모두 기대에 차 있었는데, 2월 말부터 벌어진 얄궂은 상황은 우리의 계획을 한꺼번에 앗아가 버렸습니다. 꼭 이런 일이 벌어진게 우리가 제대로 사랑하지 않은 탓인 것 같아 지금이라도 수첩 한 구석에 ‘너를 한번도 잊은 적이 없고 그래서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제대로 확실하게 써넣으면 뒤바뀐 현실이 바로 잡아질 수 있을까 안타까운 바람도 가져보지만 아쉬운 한 해는 이렇게 시나브로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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