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오죽처럼 - 배한조

석전碩田,제임스 2021. 1. 13. 06:48

오죽처럼 

 - 배한조

누가 천기를 누설했는지
초등학교 동창 밴드에
114세 96세 105세 ㆍㆍ
각기 기대수명을 놓고 분분하다.

궁금증을 못 이기고
솔직한 답과 함께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별로 하지 않으니
......
은근한 기대감으로 작성을 마쳤다.

76세
남은 수명 13년
4745일

왠지 모를 허탈감이 엄습한다.
몇 년을 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100세 시대라고 하니
그렇겠거니 하고 산 것이다.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입으로만 안 諸行無常,
환갑을 지나며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 살고자 했는데
갑자기 정해진 수명 앞에
이토록 어지러운 것인가.

시한부 환자를 보면서 나는
초연하리라 했던 장담이
낯 붉게 한다.

오죽잎이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하루라도 물 안 주면
말라죽을 화분 속 생명인데
13년이나 더 산다는 나를
위로하고 있네.

그래, 오늘을 살아야겠다.
작은 바람도 물 한 모금도 고마운
오죽처럼

- 시집, <스페이스 바> (움, 2021)

* 감상 : 배한조 시인. 호는 이당(耳堂).

1957년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자리섬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오산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인 경기공업대 기계과를 나와 평생 공업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지난 2018년 퇴직하였습니다. 2015년 <한국문학작가회>의 시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저녁노을 바라보며>(창작과의식, 2018), <스페이스 바>(움, 2021) 등이 있습니다.

‘남자 나이 오십이면 모두 시인이 된다‘는 말을 시작하면서 제가 시를 읽고 그 감상문을 블로그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때가 2017년 7월이니 벌써 3년 반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 때 썼던 글의 도입 부분을 다시 꺼내서 읽어 봅니다.

["남자 나이 쉰이면 모두가 다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삶의 치열한 전쟁터를 지나서 이제는 노년으로 접어드는 관문인 오십이 되면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으로서, 상대적으로 풍성해 진 감수성과 늘어난 경험으로 인해 인생을 바라보는 여유와 안목이 달라진다는 뜻일 것입니다. 몇 년 전부터 가끔 교보 문고에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 가면 어느새 시집 코너 서가(書架)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깜짝 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시는 나에게 어려운 문학 쟝르입니다. '어쩌면 이런 감수성을 가지고 이런 멋진 언어로 표현해냈을까' 감탄하게 되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어떤 시는 어린 아이에게 밥 먹이는 연습을 시키는 엄마가 하는 것처럼 꼭꼭 씹어서 입에 넣어주듯 설명해주기 전까지는 무슨 말인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렇게 시작된 시 감상문 쓰기가 년 수를 더하면서 이제는 제법 그 숫자가 쌓여 백 오십여 편은 족히 되었습니다. 이들 시 감상문에는 잘 알려진 유명한 시인의 시가 있었는가 하면 또 매일 만나는 가까운 지인이 어느 날 시집을 발간하였다고 건넸던 시집 속에 있던 주옥같은 시,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지만 찡하게 가슴으로 다가오는 좋은 시들도 있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나와는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시인의 시여서 마음이 설레는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4촌 큰 형님의 아들이니 촌수로 치면 5촌 조카, 그리고 호칭을 하자면 종질(從姪)입니다. 조카라고 하지만 나이는 나보다 몇 년 연배여서 어릴 적부터 마치 친 형제처럼 함께 해 온 삶의 지기(知己)입니다. 평소 모든 부분에서 그를 닮아보려고 하는, 나에게 있어선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스승’이요 ‘도반’이기도 합니다. 붓글씨와 서화 실력은 이미 공식 시화전에서 당당히 입상할 정도로 경지에 다다른 그에게서는 옛 ‘선비’의 향기가 납니다. 느지막한 나이에 시를 접한 후 여전히 텀벙 뛰어들지 못하고 그 언저리만 이렇게 맴돌고 있는 나와는 반대로, 그는 그 미지의 시 세계로 용감하게 뛰어들었고 이제 그 두 번째 시집을 내게 된 것입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제가 호로 사용하고 있는 '석전(碩田)'이라는 이름도 그가 멋진 붓글씨 작품과 함께 지어 준 것입니다.

난 해 가을, 예기치 않은 병으로 큰 수술을 하면서 느꼈던 소회를 지나가는 바람에 잎을 흔들며 꿋꿋하게 서 있는 오죽(烏竹)에 자신을 투영하여 노래한 시가 바로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오죽처럼’이라는 시입니다. 아마도 시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인생의 크로노스 바퀴를 굴려야 할 상황이다 보니 생각도 많고 또 마음도 심란 했던가 봅니다. 평소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 살고자 했는데/ 갑자기 정해진 수명 앞에/ 이토록 어지러운가’라는 표현에서 당시 그의 당황스러웠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諸行無常, 초연하리라 했던 장담이’ 낯이 붉을 정도로 부끄럽다는 시인의 고백이 실감이 납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는 오늘을 살아야겠다’고, 그리고 작은 바람도 물 한 모금도 고마워하며 언제나 변함없이 살랑살랑 바람에 손 흔드는 오죽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노래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죽(烏竹)은 [소상반죽(瀟湘班竹)]이라는 고사성어로 유명해 진 검은 무늬가 있는 흔하지 않은 대나무입니다. 요순시대, 효성이 지극했던 순 임금의 효심과 끝까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사랑의 절개를 지킨 그의 두 왕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곧은 절개와 지극한 효심, 그리고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까지 담고 있는 오죽, ‘오죽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인의 다짐은 어쩌면 이미 그가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는 고백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실제 삶이 이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을 훨씬 넘기셨지만 아직도 중년의 청년처럼 정정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효성도 늘 본 받을 만한 점입니다. 또 며느리와 사위를 본 환갑을 넘긴 신참 노년이지만 그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정진하는 모습이 선비의 그것을 닮아 주위 사람들을 이끌고 있으니 이 또한 배울 점입니다.

인의 시편들을 읽으면 마치 수필집을 읽는 것 같은 편안한 시어들과 살고 있는 도봉 일대의 자연 환경 속에서 맞닥뜨리는 대상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고 삶의 의미를 승화시키는 노래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야말로 백수 일기인 셈입니다.

비 내리는 아침 산책길 8925보

   - 배한조

매일 아침 습관처럼 하는 걷기운동
오늘은 새벽부터 오는 비로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옅은 어둠이 걷히고 있는 뒷동산을 지나서 우이천 변 보행로 5.9km의 코스에는 사람이 없다.

곧 뻐꾸기라도 울 것 같은 고요한 산속이
고향의 뒷산 어느 골짜기같이 포근하다.
빗물 머금은 산은 진한 색상으로 무게를 더하고
시들어가던 풀들이 이제는 살았다고 파릇파릇 웃는다.

산길을 벗어나 법종사를 거쳐
곳곳에 폭포를 만들고 있는 개울물이
왁자지껄 아우성치는 우이천 갓길로 들어선다.

준설작업으로 요란하던 포크레인 소리가 멎어,
아마도 남아있는 갈대밭은 손대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며
덕성여대를 지나니 천변 여기저기에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금계국이 마음에까지 물들여
세상이 온통 샛노랗다.

하상 준설로 며칠이나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청둥오리 가족도
물살을 가르며 열 지어 올라오고 있다.
어미 뒤를 졸졸 따르는 녀석들이 반가워
열두 마리와 일일이 눈인사하고 보니, 못 보던 사이에
약병아리 태를 벗고 어미 몸집만큼이나 자랐다.
그래도 아직 어미의 보호 속에 있는 것이, 꼭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 같다.
일일이 새끼를 돌보고 있는 어미의 수척해진 모습에
늙으신 어머니 얼굴이 겹친다.

연분홍 꽃을 피운 이름 모를 풀이 아름다워 궁금해하다가
오늘은 기어이 펜스를 넘어 네이버 렌즈로 사진을 찍었다.
끈끈이대나물이란다.
정말 자연은 자세히 보면 곱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불러주니 저 녀석도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건너편에는 오늘도 병든 부인을 휠체어에 태우고
노래를 불러주며 산책하는 노부부가 지나가고 있다.
저토록 애틋한 모습에 같이 걷던 아내가 코끝이 시큰한가 보다.
일전에 ‘우리시’ 사무실에서 蘭丁(난정) 선생님을 뵈었을 때 주셨던
그 어른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 치매행』은
여러 해 동안 중증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를 수발하시면서 쓰신 시다.

여든이 다 되신 蘭丁(난정) 선생님과

노래하며 휠체어를 밀고 산책하는 저 어르신,

두 분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화 향이 가득하다.

 

한일병원 앞에는 운동기구들이 빗물을 머금고

몸이 무거워진 고단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은
운동기구 사이를 간간이 못 본 척 지나가는 사람들 뿐이다.
한 손은 우산을 들고 한 손은 운동기구를 잡고
허리 운동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운동이 부족함을 못내
아쉬워하는 아내 등을 떠밀어 집으로 돌아 왔다.
8,925보.

- 시집, <스페이스 바> (움, 2021)

라기 보다는 잔잔한 일상을 스케치 하듯 써 내려간 은퇴 후 삶을 살아가는 ‘백수의 일기’라고나 할까요.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부부가 다정하게 산책하며 매일 접하는 우이천의 한가로운 풍경 속에서 건져 올리는 단상들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진한 '매화향'으로 다가 옵니다.

천지가 하얀 눈으로 쌓인 날 아침, 가장 가까이에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도반'의 시편들을 읽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모쪼록 오죽처럼, 또 엄동설한에도 꽃을 피워내는 매화처럼 아름다운 시어로 깊은 향기를 퍼치는 시인으로 오래도록 동행해주길 바라며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