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다니는 엄마
- 엄마의 일기장 1
- 유현아
휴대폰 진동이 울리면 심장이 벌렁벌렁
책상 위 서류들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엄마, 준비물 사야 해.”
전화를 받을 땐 꼭 회의 시간이 가까워 오고
“엄마, 몇 시에 들어올 거야?”
전화를 받을 땐 꼭 부장님이 불러 달려가야 하는 이상한 하루
할 얘기도 없다면서 오 분 간격으로 전화를 하는 아이
시도 때도 없이 문자 알람이 깜빡거리는 하루
직원들과 회의하는 동안
회사 전화 붙들고 숨 쉴 틈 없이 일하는 동안
답장도 못 해 주고 일하다 문득 돌아본 회사 유리창
눈물처럼 비가 내리네
우리 딸 우산도 없이 집에 갔겠네
수줍어 친구들에게 우산 같이 쓰자는 말도 못 하고
비 맞으며 집에 갔겠네
말 없는 우리 딸 터벅터벅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씩씩한 척하며 집에 갔겠네
달라붙고 끈적끈적한 교복 신경 안 쓴다는 표정으로
우리 딸 씩씩하게 집에 갔겠네
엄마 퇴근해 신발 벗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이불 뒤집어쓰고 소낙비처럼 울겠네.
- 시집 <주눅이 사라지는 방법>(창비교육, 2020.11.13)
* 감상 : 유현아 시인.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일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습니다. 2006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오래 했으며 서른이 넘어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리얼리스트 100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애지시선, 2013), <주눅이 사라지는 방법)(창비교육, 2020)등이 있습니다.
며칠 전, 친구가 올린 페이스북의 글을 읽으면서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유현아 시인의 시집에 추천사를 썼다는 내용과 함께 간단하게 소개한 시집 속의 시들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에게 어른이라는 존재가 필요한 때는 미혼모가 됐을 때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섬세한 보살핌과 정서적 지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순간인데 현실세계에선 반대다. 도움이 필요없을 땐 끼어들고 정작 도움이 필요한 순간엔 용납 못하거나 내팽개친다. 누구나 거쳤으면서도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듯 쌩까거나 오해하는 시기. 그래서 청소년기엔 대체로 외계인이다. 통역자가 필요한 시기. 유현아 시인이 그들의 통역자 겸 영매로 나섰다. 철저하게 그들의 현장과 속마음을 기반으로 한 이번 통역(접신)은 제대로라고 나는 느꼈다. 사람은 누가 내 속마음에 귀 기울여 준다는 느낌만 있어도 숨통이 트인다. 움츠렸던 어깨가 절로 펴진다. 심리치유 영역의 오랜 현장 경험칙이다.’
친구가 쓴 이 글은 발간된 지 며칠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시인의 시집을 추천하고 격려하는 진정성이 전해지는, 최고의 찬사 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심리기획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아내와 함께 집단 심리치유 현장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는 친구는 몇 년 전 <내 마음이 지옥일 때>(해냄, 2017)라는 제목의 책을 냈는데, 이런 멋진 책을 낸 저자답게 공감하는 마음과 세심한 눈으로 시인과 시를 소개하는 명문의 글을 일부러 쓴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이 시집을 인터넷으로 구매하였고 곧 배달된 시집을 첫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도 무슨 시집이냐며 호기심을 보이더니 시집을 빼앗아 시를 읽고 공감이 가는지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더군요.
오늘 감상하는 시는 회사에 다니는 엄마가 아이를 잘 챙겨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이 묻어나는 내용으로, 마치 엄마의 일기장을 살짝 훔쳐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시입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아이가 어떻게 어떻게 했겠네‘라는 표현은 ’함께 하지 못한 어미의 아쉬운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절묘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시인은 의도적으로 반복적인 리듬을 살려서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리드미컬하게 읽다보면 이내 독자인 내가 시인의 마음이 된 듯 울컥 서러움의 감정이 올라오는 걸 멈출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꼭 필요할 때 ’바로 그 현장에 함께 해 주지 못한‘ 일하는 엄마의 입장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어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엄마와 아이가 만나는 순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소낙비처럼 우는 아이를 묘사하는 장면에 다다르면,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은 이제 아이의 마음이 되어 함께 펑펑 울고 싶어지는 희한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녀의 시집을 다 읽고 난 후, ’열입곱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라는 부제를 달았으면 훨씬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시들은 모두 열일곱 살 세영이와 희정이의 눈으로 본 세상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집에 실려 있는 시인의 다른 시 한 편을 더 읽어 보겠습니다.
열일곱
- 유현아
삼촌은 양탄자를 타고 다니는 알라딘이라고 했지
양탄자는 이제 없다는 걸 알 아이야, 나도
삼촌 트럭에 올라타 끈적끈적한 바람 마시며 도로를 달린 적도 있지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걸 알 나이야, 나도
삼촌은 인기가 많아 전화가 폭풍처럼 휘몰아친다고 했지
“예, 예.” “곧 갑니다.” “잠시만요.”
삼촌이 아주 잘 쓰던 대답이었지
그중 ’고객님‘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는 걸 알 나이야,나도
우리 아파트 관리소장님이 삼촌한테
’어이, 택배, 엘리베이터 타지 말고 걸어 다녀.“라고 했을 때
그냥 지나친 나를 곁눈질로 봤다는 걸 알 아니야, 나도
우리 조카는 공부 잘해서 삼촌처럼 되지 말아야지
삼촌, 나 정보산업고등학교에 다녀
어쩌면 삼촌처럼 양탄자를 타고 다닌다고 뻥칠 수도 있어
어쩌면 삼촌처럼 걸려 오는 전화기 속 목소리들을 대신해 일할 수도 있어
어쩌면 삼촌처럼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도 뛰어다녀야 할 수도 있어
삼촌은 최고지
고등학교 입학했다고 진심으로 축하해 준 사람은 삼촌뿐이었어
엄마한테 돈 꾸러 온 거 알지만 모르는 척한 건 예의상 그랬어
삼촌을 좋아하지만 삼촌처럼 힘들게 사는 게 무서워
가끔 삼촌을 못 본 척하는 건 내가 열일곱이라서 그런거야
- 시집 <주눅이 사라지는 방법>(창비교육, 2020)
아무 생각없이 엉뚱한 짓만 하는 열일곱 철부지인 것 같아도 이미 알건 다 아는 눈과 귀, 눈치까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특성화고 학생도, 어떤 십 대도,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시인은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고유하게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친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동·청소년기에 어떤 상황, 어떤 권위에도 주눅 들지 않고 자기 속도, 자기 결대로 사는 법을 몸에 익히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평범한 어른이 된다. 화날 때 화내고, 자주 웃고, 자기 경계가 있고, 너도 나만큼 귀한 존재라는 걸 훤하게 아는 평범한 사람.
내 속도가 네 속도여야 한다고 윽박지르고 내 취향이 네 취향이라 우기는 상황에서 제대로 살 재간은 누구에게도 없다. 못 견딘다. 그렇게 주눅 들면 다 꼬인다. 세상도, 나도, 너도. 이 시집을 읽으며 생생하게 실감했다. . 치유시집이다. 어깨 펴고 읽었다.”
친구의 말처럼 나도 어깨 펴고 읽은 시집이었습니다.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오는 듯 치유와 상담의 길에서 진정성 있게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도반들을 만난 기쁨으로 빙그레 미소가 돌았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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