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음모陰毛라는 이름의 음모陰謀 - 김민정

석전碩田,제임스 2020. 11. 18. 06:35

음모陰毛라는 이름의 음모陰謀

 

                                                   - 김민정

 

머리털 나 처음으로 돈 내고 다리 벌린 날, 소중한 당신 산부인과에는 다행히 여의사만 둘이었다. 어디 한번 볼까요? 자궁경부암 진단용 초음파 화면 가득 잘 익은 토마토의 속살이 비릿한 붉음으로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깨끗하네요, 그런데 자궁 모양이 좀 특이해요, 뾰족하다고나 할까. 거웃 나 처음으로 내 아기집을 구경한 날, 어쩌다 뾰족한 자궁이 된 나는 콘헤드(conehead)의 아이 하나 고깔 쓴 제 머리 꼭지로 내 배를 콕콕 찌르는 상상만으로도 아 따가워 가시를 영 빼버릴 참이었는데 제모 어떠세요? 내 아랫도리를 헤집다 말고 얼굴을 쳐든 여의사가 코끝까지 밀려내려온 안경테를 걷어올리며 묻는 것이었다. 레이저 기계 새로 들여 행사중이에요, 겨드랑이 털과 패키지로 하세요, 휴가철인데 비키니라인 신경쓰셔야지요. 머리털 나 처음으로 거창까지 상가에 조문가는 날, 안성휴게소 화장실에 쪼그려 오줌이나 누는데 문짝에 덕지덕지 이 많은 스티커는 누가 다 붙여놓은 것일까. 여성 희소식 당신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 02-969-6688 여성 무모증 빈모증 수술하지 않고 완전 해결! 마르크스도 이런 불평등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거다.

 

-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 지성사, 2009)

 

* 감상 : 김민정 시인, 출판인, 문학편집인.

1976년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검은 나나의 꿈’ 외 9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문학과지성사, 2009), <아름답고 쓸모없기를>(문학동네, 2016),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문학과지성사, 2019) 등이 있으며 산문집 <각설하고,>(한겨레출판사, 2013)가 있습니다. 박인환문학상(2007), 현대시작품상(2016), 이상화시인상(2018)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랜덤하우스 코리아>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21세기 한국 현대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랜덤하우스시선을 책임 편집하면서 많은 젊은 시인들을 발굴하였습니다. 현재 <문학동네>에서 문학전문 출판사 <난다>의 대표로 재직 중이며 문학동네 시인선을 책임 편집하고 있는 대한민국 문단을 대표하는 스타 편집자입니다.

 

난 2016년, 김민정 시인이 제17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될 당시 심사위원회는 그녀를 수상자로 선정하는 이유를 ‘자기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펼쳐 오면서 많은 후배 시인에게 강한 영감과 영향력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그녀의 독특한 시 세계입니다. ‘김민정 시인 = 언어유희’라고 할 정도로 그녀의 시에선 놀랄만큼 현란한 말놀이(language fun)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시에 담긴 언어 이미지들은 비호감이나 비루하기까지 하지만 어딘가 유쾌하고 통쾌한 이 시대의 풍경을 포착하고 있으며,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이야기(스토리텔링)를 통해서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음은 그녀의 언어 유희가 놀랄만큼 개방적이라는 점입니다. 화두와 화투, 젖과 좆, 페니스와 페이스, 해피와 피해, 미혼과 마흔, 오빠와 오바, 화장(化粧)과 화장(火葬), 여성부와 이성부, 끝과 끗, 시작(始作)과 시작(詩作), 음모(陰毛)와 음모(陰謀) 등 끝이 없이 빛을 발합니다. 어느 평론가는 김민정 시인을 희망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농담, 넉살, 패러디, 난센스, 해학, 언어의 유희, 동화적인 환상 같은 것들을 끌어다가 시 속에 집어넣어 비빔밥처럼 맛깔스러운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시인’이라고 평을 했습니다.

 

리고 ‘입심이 좋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제멋대로인 시인’답게 자유롭고 개성이 넘쳐, 흔히 우리가 시에서 기대하는 질서와 형식을 거부하는 새로운 시 운동의 시작이라고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시라면 어떠해야 한다는 정형화된 생각을 깨는 그녀의 새로운 시도는 ‘미래파’로 불리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아 오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를 읽으면서 아마도 많이 불편한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평생 한번 써 볼까 말까 하는 단어, 그리고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리얼한 상황을 거침없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웃’이라는 단어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말 대사전을 보면 ‘사람의 성기 주변에 난 털'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시 제목에 나오는 음모(陰毛)의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음모와 또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남성 중심 세상을 빗대면서 사회의 음모(陰謀)를 가차없이 까발리고 있습니다.

 

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들은 절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이 시는 쉼없이 나열하고 있기에 남성의 시각에 붙박혀 있는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은 여성이면서도 당연히 행복한 하계 휴가를 위해서 제모를 권하는 의사가 기분 좋게 권하는 패키지 상품이 마치 화면 가득한 속살만큼이나 비릿하게 다가옵니다. ‘머리털 나 처음으로 돈 내고 다리 벌린 날‘이라든지 ‘화장실에 쪼그려 오줌이나 눈다’는 표현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어느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서서 오줌 누고 싶은 마음이 열등감으로 드러나야 하는 사회, 그리고 돈을 받으면 다리를 벌리는 게 당연한 사회를 은근히 독자에게 일러바치는 듯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희소식 당신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수많은 광고 스티커를 있는 그대로 옮겨 적었을 뿐인데도 평등을 거창하게 주장하면서 마르크스의 불온한 이론에 목맸던 수많은 이론가나 철학자, 사회 운동가들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묘미가 있는 시입니다. 이 시는 폼 잡고 여성의 정체성이나 성 불평등을 주장하는, 소위 ‘페미니즘 운동’과 같은 발언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시를 다 읽고 난 독자들은 뭔지 모르지만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시인의 의도에 이미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부장적이고 남성 중심 사회, 그리고 그 사회를 당연한 듯이 즐기면서 여성을 하나의 상품처럼 대하는 ‘남자들’을 그녀의 방식으로 통쾌하고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는 시 하나를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 김민정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지성사, 2009)

 

직한 발성과 깊이 있는 사색’이 어우러져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듯 합니다. 그 녀의 사전에는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솔직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녀의 시 앞에 서면 한없이 불편함을 느끼게 되기도 하지만 그 ‘불편함’의 실체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결국 내가 가진 알량한 기득권과 돼먹지 않은 욕심이 걸림돌처럼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니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이런 불편함의 진실은 점점 더 늘어가겠지만 그 걸림돌에 넘어져 영원한 꼰대가 되지 않도록,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 퇴물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