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 양반 왕자지
- 이대흠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 거튼 사램이었제
왕자 거튼 사램이었제
- 시집 <귀가 서럽다>(창비, 2010)
* 감상 : 이대흠 시인.
1967년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예술대학과 조선대를 나와 목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4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1999년에는 <작가세계>를 통해 소설로 등단한 후 질박한 전라도 사투리와 흥겨운 남도 가락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남도 서정의 맥을 이으며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문단과 언론 매체의 호평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시집으로는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창비, 1997), <상처가 나를 살린다>(현대문학북스, 2001), <물속의 불>(천년의 시작, 2007), <귀가 서럽다>(창비, 2010),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창비, 2018)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청앵>을 비롯하여 산문집 <이름만 이삐먼 머한다요> 등 8 권의 저서를 발간하여 그 저력을 문단 내외로부터 인정받고 있습니다. 현대시동인상(1997), 작가세계소설부문 신인상(1999), 애지문학상(2003), 육사시문학상(2010), 조태일문학상(2019)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장흥 천관문학관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인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에 실린 ‘장흥’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장흥에서 조금 살다보면 누구든지/장흥 사람들이 장흥을/자응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하지만 자응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장흥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장흥 사는 사람과/자응 사람은 다르다//자응 장에 가서/칠거리 본전통이나 지전머리를/바지 자락으로 쓸어본 사람이라야 겨우/물짠 자응 사람이 된다//독실보건 백룡쏘건/ 예양강에 붙은 어느 또랑에서라도/ 뫼욕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자응에 간이 배고/자응으로 척척해진 사람이랄 수 있다//(…)//장흥에서 자응으로 가는 데는/십년이 족히 걸리고/자응에서 또 자앙, 장으로 가는 데는/다시 몇 십 년이 걸린다(...)
그가 태어 난 곳 장흥을 속 깊이 알게 되려면 적어도 몇 십 년은 족히 걸려야 하는데, 시인 자신도 이제 타향을 전전하다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와서야 ‘장흥’을 제대로 알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감상하는 시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 시에 등장하는 ‘장흥’이라는 지명의 의미를 세심하게 새기면서 읽어야 할 듯 합니다.
시 속의 주인공인 수문댁은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예순이 넘은 나이에 한글을 처음 배웠나 봅니다. 그런데 한글 가나다를 배우고 나니 새로 익힌 말과 이제껏 써왔던 말이 달라도 너무 달라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하고 ‘쎄’가 엉켜서 말이 뒤엉키는 현상을 경험하기 일쑤입니다. 가새는 무엇이며 가위는 무엇인지, 부렀다와 버렸다처럼 사투리와 표준말의 차이에서부터, 일상에서 쓰는 모든 말들이 온통 뒤죽박죽인 느낌 뿐입니다. 바로 이런 현상을 고향 사투리에 조예가 깊은 시인은 놓치지 않고 특유의 장흥 사투리 묘미를 살려 재미나게 그려내고 있는 시입니다.
누군가 먼저 간 남편을 겨냥해 써놓았을 법한 화장실 벽에 있는 욕 낙서, “수문 양반 왕자지”라는 글씨가 지금까지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지나쳤는데, 아마도 오늘따라 그 말이 제대로 눈에 쏙 들어왔나 봅니다. 그래서 수문댁은 그 말을 ‘왕자 거튼 사램’이라 이해하게 되고 먼저 간 지아비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던 것입니다. 시는 바로 이 표현을 장흥 사투리로 반복해서 읊고 있습니다.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이 말을 반복하는 수문댁의 ‘한글 읽기와 오해’는 노래가 되고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욕을 써 놓았지만 그 욕을 욕으로 읽지 않고 ‘하늘같은 사람, 왕자 같은 사람’으로 추억했으니 참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오독(誤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투리 하면 생각나는 대통령이 있습니다.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입니다. 아시다시피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은 경상남도 거제입니다. '학실히'(확실히), '씰데(쓸데)없는 소리', '이대한'(위대한) 등 이중모음을 잘 발음하지 못했던 그의 진한 경상도 사투리 덕분에 무겁고 권위적인 존재로만 각인되어 온 우리나라 대통령의 이미지가 친근함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요. 바로 사투리와 향토 방언의 마법 같은 힘이라고나 할까요.
말이 나온 김에 김 전 대통령과 관련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사투리 관련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볼까요.
“각하, 경상도에서 '갑자기'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수행 기자가 그렇게 묻자 "글쎄?"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김 전 대통령은 " '각중에'(갑자기) 물으면 우짜노"라고 대답했다는 말이 유명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또, 고향인 거제도의 가라산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통되자 김 전 대통령은 준공식에 참석해서 이렇게 연설했다고 합니다. “이대한(위대한) 거제도민 여러분, 오늘 가라산을 간통(관통)하는 도로가 완공되어 앞으로 거제도를 국제적인 강간도시(관광도시)로 만들겠십미다. 여러분." 그러자 옆에 있던 외무부장관이 말했습니다. "각하! 간통이 아니라 관통이고 강간도시가 아니고 관광도시입니다." 살짝 기분이 상한 김영삼 대통령은 이렇게 쏘아붙였다고 합니다. "애무부(외무부) 장간(장관)은 애무나 잘 하시오.“
서울로 전학을 와서 공부하던 중학생 시절, 고향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서울역 대합실에 가 그곳에 우두커니 앉아 막 도착한 열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동향 사람들이 쏟아내는 사투리를 듣는 것만으로 향수를 달랬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뿌리를 생각나게 하는 고향의 말은 그저 사투리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어딘가 아쉬운 게 사실입니다. 걸쭉한 사람 사는 정이 묻어나는 맛은 사투리가 아니고서는 다 표현하기 부족하니까요. 이 완연한 가을 날, 장흥 사투리 맛이 제대로 나는 그의 시 하나를 더 읽으면서 글을 맺습니다. - 석전(碩田)
늦 가을 들녘
- 이대흠
널평네 양반 돼지 한 마리 팔고 오는 길에
젤 먼저 국밥집 들러 막걸리 두 되 마시고 현찰로 줘불고
밀린 술값까지 탈탈 털어 쥐알려불고
내친김에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종재기골 양반네 막걸리 값까지 개러불고
종묘상 들러 고추 모종값 갚어불고
지전머리 단골 점방에 가서 묵은 외상값 죽에불고
방엣간 떡값 밀린 거 잉끼레불고
농협에 가서 비료값 꼬랑지 짤라불고
쐬주 두 병 사 엄버줌서 괴춤 또 풀어불고
풍로 바람에 검불 날리대끼 다 까묵어불고
빙골로 돌아가는 저 늦가을 들녘
- 시집,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창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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