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음악
- 루이스 글릭
아직 천국을 믿는 친구가 있어요.
어리석은 이는 아니지만, 그녀는 요즘도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을
그야말로 신에게 꼬박꼬박 얘기합니다.
그녀는 하늘에서 누군가가 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상에서 그녀는 예사롭지 않게 유능합니다.
불쾌함을 직면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흙 속에서 죽어가는 애벌레를 봤죠.
탐욕스런 개미가 그 위로 기어올라가고 있었죠.
난 항상 어떤 곤경에 빨리 움직이고
항상 사나운 것에 제동거는 데에 열정적입니다.
하지만 소심함이 또한 내 눈을 재빨리 감게 합니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그 일이 진행되도록 놔두면서
내 친구는 지켜볼 수 있었지만
나를 위해 그는 끼어들었죠.
몇 마리의 개미를 털어내어 그 찢어진 녀석에게서
떼어냈죠. 그리고 그 애벌레 녀석을
길 저편에 내려놓았죠.
내 친구는 말합니다. 내가 신을 향한 눈을 감았다고.
다름이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는 것에 대한
나의 반감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녀는 말합니다. 저 빛은 슬픔을 불러일으킨다고
혼자 중얼거리며 보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처럼
베개에 자기 머리를 파묻는 어린 아이 같다고.
내 친구는 엄마 같아요.
용기있는 사람인 그녀 자신과 같은
어른을 깨어나게 하라고
내게 요구하는 환자 같아요.
꿈 속에서 내 친구가 나를 비난합니다.
우리는 같은 길 위를 걷고 있었지요.
지금인 겨울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녀는 내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사랑할 때 천상의 음악을 듣는다고.
위를 쳐다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내가 위를 쳐다보니,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구름들이 있고, 아주 높이 뛰어오른 신부들 같은
나무들을 하얗게 물들인 백설이 있을 뿐.
그러면 나는 그녀가 걱정스럽습니다.
그녀가 대지 위에 촘촘하게 깔린 그물망에
걸린 그녀를 보게 될까봐 말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길섶에 앉아
노을을 바라봅니다. 때때로
침묵이 새들의 지저귐에 뚫리지요.
바로 이 순간입니다.
우리가 죽음과 함께 고독과 함께
편안하게 같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하는 때죠.
내 친구는 흙먼지에 둥근 원을 그립니다.
그 안에 그 애벌레가 꼼짝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항상 전체적인 어떤 것,
아름다운 어떤 것,
그녀와 별개의 삶일 수 있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는 아주 고요히 있었습니다.
여기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평화로웠습니다. 그 풍경이
들어와 앉았습니다. 길은 갑작스레 어두워지고
공기는 차가워지고 여기 저기 바위들이
빛나고 반짝거렸지요.
우리 둘 다 사랑하는 것은
이 적막이었습니다.
형체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의 죽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Celestial Music
-Louise Elisabeth Glück.
I have a friend who still believes in heaven.
Not a stupid person, yet with all she knows, she literally talks to God.
She thinks someone listens in heaven.
On earth she's unusually competent.
Brave too, able to face unpleasantness.
We found a caterpillar dying in the dirt, greedy ants crawling over it.
I'm always moved by disaster, always eager to oppose vitality
But timid also, quick to shut my eyes.
Whereas my friend was able to watch, to let events play out
According to nature. For my sake she intervened
Brushing a few ants off the torn thing, and set it down
Across the road.
My friend says I shut my eyes to God, that nothing else explains
My aversion to reality. She says I'm like the child who
Buries her head in the pillow
So as not to see, the child who tells herself
That light causes sadness-
My friend is like the mother. Patient, urging me
To wake up an adult like herself, a courageous person-
In my dreams, my friend reproaches me. We're walking
On the same road, except it's winter now;
She's telling me that when you love the world you hear celestial music:
Look up, she says. When I look up, nothing.
Only clouds, snow, a white business in the trees
Like brides leaping to a great height-
Then I'm afraid for her; I see her
Caught in a net deliberately cast over the earth-
In reality, we sit by the side of the road, watching the sun set;
From time to time, the silence pierced by a birdcall.
It's this moment we're trying to explain, the fact
That we're at ease with death, with solitude.
My friend draws a circle in the dirt; inside, the caterpillar doesn't move.
She's always trying to make something whole, something beautiful, an image
Capable of life apart from her.
We're very quiet. It's peaceful sitting here, not speaking, The composition
Fixed, the road turning suddenly dark, the air
Going cool, here and there the rocks shining and glittering-
It's this stillness we both love.
The love of form is a love of endings.
* 감상 : 루이스 글릭(Louise Elisabeth Glück).
미국의 시인이자 수필가. 1943년 4월 22일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롱아일랜드에서 성장하였습니다. 1968년 그녀의 첫 시집, <맏이(Firstborn)>로 등단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야생붓꽃’(1992), ‘아킬레스의 승리(1985)’, ‘아베르노(Averno)’(2006)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 총 12권의 시집과 수필집이 발간되었지만, 아직까지 한국어로 번역되거나 소개된 적은 없습니다. 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노벨상 위원회는 "엄청난 아름다움으로 개인의 경험과 존재를 보편적으로 만드는 그녀의 틀림없는 시적 목소리 때문에 그녀를 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글릭은 미국 국가 인문학 메달, 퓰리처 상, 국가 도서상, 국가 도서 비평가 서클상 및 볼링겐 상을 포함하여 미국에서 많은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종종 ‘자서전 시인’으로 소개되는데 이는 대부분의 그녀의 작품들이 종종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그것을 통해서 보편적인 가치와 정신으로 잘 형상화하여 승화하는 데 탁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릭은 10대 시절 거식증으로 고통을 받았고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 때는 결국 중퇴를 했습니다. 글릭의 초기 작품인 ‘아라라트’(Ararat, 1990)등에서는 이러한 병치레와 실패한 연애경험, 불행한 가족사 등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이런 경험에서 온 죽음, 상실, 거절, 관계의 실패 등의 트라우마와 욕망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그 자신의 경험과 슬픔, 고립의 경험을 소박하고 솔직한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해 내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현재 Glück은 예일 대학교의 레지던스 부교수이며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잡지인 <Poets & Writers>와 했던 인터뷰에서 그녀는 ‘젊은 시절에는 작가라면 으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적인 삶의 태도로 글을 쓰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의 창조와 작가로서 과시하는 태도로 일관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아무것도 쓸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삶을 포기하는 것 같이 끔찍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스스로 내린 결론은, ‘솔직한 나의 삶을 드러내며 살자’는 결단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또 자신만의 열정적인 에너지로 스스로에게 진솔해질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글이 나온다’는 평범하지만 아주 귀한 진리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작가입네 하면서 겉멋에 들어 현학적인 글쓰기에 도취한 예술가가 아니라, 내 이야기, 나 자신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쓰면서 삶 속에서 작품 활동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은 그렇게 살다가 가겠노라고 다짐하는 시인에게, 올해 주어 진 큰 상은 아마도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마음껏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애벌레의 주검에 관한 에피소드가 '내 친구와 나 사이에 오가는 생각의 흐름'으로 펼쳐지면서 죽음에 대한 깊고 날카로운 질문을 하게 되는 형식입니다. ‘친구’라고 소개했지만, 어쩌면 시인 자신의 예전의 모습을 지칭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애벌레에 달려드는 개미를 털어내고, 애벌레를 길섶에 따로 '피신'시켜 죽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친구는, ‘천상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친구에 의하면 ‘천상의 음악’이란 신의 목소리로도 읽히고 우리가 살아가는 규범, 또는 도덕률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주 죽음이란 무엇이냐 묻고, 영원은 또한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는 무엇이 있으며, 이 삶 전체는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묻기도 합니다. 글릭은, 그런 공허한 질문들을 시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인 친구의 표정과 행동 속에서, 혹은 생각 속에서, 혹은 그 태도 속에서 가만히 그 답을 찾아가도록 시를 전개해 나갑니다.
진짜 천상의 음악은 도대체 뭘까. 저 노을이 내리는 적막 속에서 죽은 애벌레 하나가 더욱 꾸둑꾸둑해지는 시간, 그리고 그걸 중심으로 거기에 마주 앉아있는 나와 친구, 빛과 바람이 스며드는 ‘바로 그곳에 잠깐’ 실존과 그 이후의 비밀이 숨어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침묵과 적막의 순간을 명징하게 표현한 시입니다. 참으로 글릭답게 귀납법적으로 보편적인 결론으로 몰아가는 전개가 사랑스럽고 기이할 뿐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 삶이 뒤따르지 않는 값싼 용서와 사랑을 말하는 현실 기독교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심각한 화두를 던졌던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 카메라가 쏟아지는 빽빽한 햇살을 길게 비추는 화면이 데쟈뷰처럼 생각이 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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