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 안명옥

석전碩田,제임스 2020. 10. 7. 06:33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 안명옥

놀라워라,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간다 참지 못할 만큼 오줌이 마려워
걸음이 평소보다 급하다 오줌 마려운 것이,
나를 이렇게 집 쪽으로 다급하게 몰고 가는 힘이라니!
오줌이 마렵지 않았다면 밤 풍경을 어루만지며
낮엔 느낄 수 없는 밤의 물컹한 살을 한 움큼
움켜쥐며 걸었을 것을 아니 내 눈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저편, 그 너머까지
탐색했을 지도 모를 것을
지금 내게 가장 급한 것은 오줌을 누는 일
지나가는 사람들 없는 사이
무릎까지 바지를 끌어내리고 오줌을 눈다
오줌을 누는 것은 대지와의 정사 혹은
내 속의 어둠을 함께 쏟아내는 일,
그리하여 다시 오줌이 마려워오는 순간이 오기까지
내 속이 잠시나마 환해지는 일
변기가 아닌, 이렇게 아파트 단지의 구석에 쭈그려 앉아
몰래 오줌을 누는 일이

일탈의 쾌감이 내川를 이뤄
이렇듯 밤의 대지를 뜨겁게 적실 수 있다니,
어둠 속에서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내 엉덩이가 달이 되어 공중으로 둥둥 떠오른다

- 시집 <칼>(천년의 시작, 2008)

* 감상 : 안명옥 시인.

1964년 4월,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남양고등학교(당시 남양종합고교)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2002년 <시와시학> 제1회 전국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칼>(천년의 시작, 2008), <뜨거운 자작나무숲>(리토피아, 2016), <달콤한 호흡>(천년의 시작, 2018) 등이 있으며, 서사시집으로 <소서노>(문학의전당, 2005),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문학의전당, 2012)가 있고, 창작 동화집으로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금방울전>, <파한집과 보한집>, <고려사> 등이 있습니다. 성균문학상, 바움문학상 작품상(2011), 만해‘님’ 시인상, 제7회 김구용문학상, 베스트 멘토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고양예술고등학교에서 문예창작 전문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고 군인들을 대상으로 독서지도, 또 금연강사도 하는 등 주변의 다양한 관계들을 잘 만들어가고 있는 생활인이기도 합니다.

인을 소개하는 평론가들이 그녀를 탁월한 스토리텔러(이야기꾼)라고 평하고 있듯이, 그녀가 그동안 낸 작품집들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합니다. 동화면 동화, 서사 시집이면 서사시집, 역사적인 인물을 현실에 되살려 내는 그녀의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합니다.

범한 일상의 소재를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건져 올리는 능력이 바로 이야기꾼의 재능이라면, 오늘 감상하는 시에서도 그런 면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경험할 만한 난감한 상황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묘사하는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에 도착할 때까지 참아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거의 집에 도착할 무렵 서둘러서 슬쩍 어느 아파트 화단으로 뛰어들어 참았던 오줌을 시원하게 쏟아내는 그 쾌감을 시인의 느낌으로 표현한 시에서 묘한 스릴감을 느끼게 됩니다. 시인도 이렇게 ‘오줌을 누는 것은 대지와의 정사’, ‘일탈의 쾌감’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시인은 그런 경험을 그저 재미삼아 쓴 게 아니라, 이 시를 통해서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쏟아내는 일’ 즉, ‘내 속이 잠시나마 환해지는 일’로 승화시키는 시의 임무를 잊지 않습니다. 이 시의 행간을 읽으면, 시인으로서 앞으로 그녀가 해 나갈 일이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오줌이 마려워 서두르다보니 간과했던 것, ‘내 눈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저편, 그 너머까지 탐색’해야만 했던 일을 복선처럼 표현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연에서 그저 변기가 아닌, 이렇게 아파트 단지의 컴컴한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무릎까지 바지를 끌어내리고 오줌을 누는 용기를 냈을 뿐인데, ‘이렇듯 밤의 대지를 뜨겁게 적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그 복선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자신의 엉덩이가 달이 되어 두둥실 공중으로 떠올라 대지를 뜨겁게 적실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는 시인으로서의 결연한 선서 같습니다.

치 않은 경험이지만 이런 낯선 하나의 삶의 경험도 허투루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야기를 엮어내는 그녀는 글을 쓰는, 천생 ‘글쟁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글쓰기를 처음 세상에 선보이면서 활동을 시작한 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세간에 이름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7년 김구용문학상을 수상하면서입니다. 절절한 삶의 치열함이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소재가 되고 또 에너지원이 되어 시인 자신을 살리고,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마법이 되었다는 사실을 세상이 인정해 주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 당시 어느 언론 매체와 했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를 쓰는 순간은 어떤 시간, 어떤 삶도 낭비되는 시간이 없어요. 고통의 시간이든, 밑바닥까지 내려간 절망의 시간이든, 벼랑 위의 아슬아슬한 시간이든 시로서 승화되는 삶을 살 수 있죠. 이건 시(詩)가 주는 선물라고 생각해요’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똥이나 오줌이 마려운 개처럼 이리저리 왔다갔다 뱅글뱅글 돌면서 삶의 쳇바퀴만 열심히 돌리는 사람입니다. 뭐가 그리도 바쁜지 밥 한 끼 함께 먹을 여유도 없어 가끔 통화를 하면서 식사 제안을 하면 지레 바쁘다고 연막을 쳐 놓고 거리두기를 하는 인상을 풍기기도 합니다. [바쁜 사람 = 나쁜 사람]이라는 공식은 제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이제는 그런 항상 바쁜 사람을 만나면 정이 별로 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인이 ‘오줌 마려운 것’이 자신을 이렇게도 서두르고 바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달았던 것처럼, 이제는 비록 내 엉덩이가 달이 되어 공중으로 둥둥 떠오르는 일이 있더라도, 가끔은 시끄러운 낮에는 느낄 수 없는, 밤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어루만지고 탐색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가져 볼 일입니다. 이 가을에는 더욱 더.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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