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 공광규
밥을 구하러 종각역에 내려 청계천 건너
빌딩숲을 왔다가 갔다가 한 것이 이십 년이 넘었다
그러는 동안 내 얼굴도
도심의 흰 건물처럼 낡고 때가 끼었다
인사동 낙원동 밥집과 술집으로 광화문 찻집으로
이런 심심한 인생에
늘어난 것은 주름과 뱃살과 흰 머리카락이다
남 비위를 맞추며 산 것이 반이 넘고
나한테 거짓말한 것이 반이 넘는다
그러니 나는 가짜다 껍데기다
올 초파일 절에서 오후 내내 마신 막걸리가
엄지발가락에 통풍을 데리고 와
몸이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제는 사무실 가까이 와 저녁을 먹고 간 딸이
아빠 얼굴이 폼페이 유적 같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내 나이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똑같다
안구에 건조한 바람이 불고
돋보기가 있어야 읽고 쓰는데 편하다
맑은 날에도 별이 흐리다
눈이 침침한 것은 밖을 보는 것을 적게 하라는
몸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광교 난간에 기대어 청계천을 내려다보는데
얼굴 윤곽이 뭉개진 그림자가
물살에 일그러진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 시집, <파주에게>(실천문학사, 2017)
* 감상 : 공광규 시인.
1960년 경자년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나 충남 홍성과 보령을 거쳐 청양에서 성장했습니다. 동국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문학박사)를 졸업했으며 1986년 월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는 <대학일기>(실천문학, 1987), <마른 잎 다시 살아나>(한겨레, 1989), <지독한 불륜>(실천문학, 1996), <소주병>(실천문학, 2004), <말똥 한 덩이>, <담장을 허물다>, <파주에게>(실천문학, 2017)가 있으며 어린이를 위하여 <성철 스님은 내 친구>(재능출판, 1993), <마음 동자>(화남, 2004), <윤동주>, <구름>을 쓰기도 했습니다.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연구>, <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그리고 등단 30주년을 기념해서 지난 2016년에는 <맑은 슬픔>(교유서가, 2016)이라는 산문집도 한 권 펴냈습니다. 신라문학대상, 윤동주문학대상(209), 동국문학상, 김만중문학상(2010), 현대불교문학상(2011), 고양행주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2013년 자연 친화적이고 호방한 시 '담장을 허물다'가 시인과 평론가들이 뽑은 그 해 가장 좋은 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뒤늦게 서예와 문인화에 관심을 가져 2016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입선하였고 그의 시 ‘별국’, ‘얼굴반찬’, 수필 ‘맑은 슬픔’ 등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습니다.
국책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포항제철에 취직, 수년 간 노동현장에서 일하다가 바라 본 대학과 대학생들의 현실을 담아 낸 그의 첫 시집 <대학일기>가 문제가 되어 공기업에서는 현실 비판, 저항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당하지 않다고 해직을 당하는 터무니없는 수모를 겪었던 시인은 그 후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고 그 후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지금은 대학에 출강을 하면서 계간지 [불교문예]의 주간을 맡고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이 쓴 추천의 글을 읽으면 시인과 그의 시를 좀 더 알 수 있는 힌트가 될 듯합니다.
'좋은 시는 어렵지 않다. 좋은 시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모순 앞에 정직하고 진솔하다. 공광규의 시가 그렇다. 좋은 시는 읽는 내내 아프다. 공광규의 시가 그렇다. 그의 시의 공간도 시간도 모두 아프다. 그의 시는 몸으로 우는 악기소리 같다. 그런데 아픈 이야기를 남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풀어놓고 있다. 가혹한 운명에 대해 노래하면서도 꽃나무 한 그루 옆에 세워 두고, 요절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도라지꽃 한 송이 피워 놓는다. 상처와 아픔을 불교적 서정으로 덮는 내공도 깊을 뿐 아니라, 흔들렸다가는 다시 수평으로 돌아오는 수면처럼 평상심을 유지하는 사유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볼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리라.'
오늘 감상하는 시는 20년 같은 일을 하면서 오갔던 사무실 근처 청계천을 건너다 물 밑으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자화상’을 노래한 시입니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시 하면 금세 떠오르는 것이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입니다.
자화상(自畵像)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산모퉁이 어느 우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돌아가다가, 그 모습이 너무 미워 다시 돌아와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유명한 윤동주의 시입니다. 아마도 공 시인이 이 시를 쓰면서 제목을 ‘자화상’이라고 했던 것은, 윤동주가 자신을 보면서 자아성찰을 했던 동일한 참회와 성찰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로 그 나이가 되었고, 또 2세인 딸이 자기를 바라보면서 ‘아빠 얼굴이 폼페이 유적 같다’고 한 말이 겹쳐지면서 오늘따라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지난 인생을 되돌아 본 듯합니다. ‘남 비위 맞추며 산 것이 반이 넘고/ 나한테 거짓말한 것이 반이 넘는다’고 고백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 모든 게 다 ‘가짜고 껍데기일 뿐’이라고 성찰하는 시인의 자화상이 쓸쓸합니다. 광교 난간에 기대어 청계천에 비친 ‘윤곽이 뭉개진 얼굴 그림자’는 영락없이 ‘낡고 때가 낀 폼페이 유적’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의 대표적인 시 ‘별국’과 다른 시들에서 동일하게 등장하는 시적 은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배고픈 유년의 가난한 시절, 어머니가 끓여 주시곤 했던 ‘멀덕국’ 속에 비치는 별 빛과 달 빛 등 그가 슬픔을 승화시키기 위해서 동원하는 물에 비치는‘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에서도 ‘청계천 물살에 비친 일그러진 내 모습’이 곧 그의 자화상입니다.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은 곧 그의 유년의 추억이자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는 모습입니다.
맑은 날에도 별이 흐리고 눈이 침침한 것은 밖을 보는 것을 적게 하라는 몸의 뜻인지 모르겠다고 노래하는 시인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지혜를 어슴푸레 발견한 듯 합니다. 어수선한 주변의 소리와 광경은 적게 보고 이제는 남 비위 맞추며 사는 것이 아니라 ‘안의 소리’, 즉 자신을 돌아보고 나 스스로에게도 거짓 없이 살아야겠다고 성찰하는 다짐이 엿보입니다.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는 하늘, 그리고 파아란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이 가을에, 시인처럼 물속에 비친 ‘나의 자화상’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겸허하게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 볼 일입니다. 비록 눈이 침침해서 필시 일그러지고 흐릿한 자화상이겠지만 말입니다. - 석전(碩田)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 안명옥 (0) | 2020.10.07 |
---|---|
추석 - 권선희 (0) | 2020.09.29 |
좌우에 대한 숙고 - 정한용 (0) | 2020.09.16 |
구월이 오면 - 안도현 (0) | 2020.09.09 |
사무원 - 김기택 /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0) | 2020.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