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원
-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大藏經(손익관리대장경)과 資⾦收⽀⼼經(자금수지심경)
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장좌불립⾧座不⽴’ 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시집 <사무원>(창작과비평사, 1999>
* 감상 : 김기택 시인.
1957년 11월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 학과의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뭄’과 ‘꼽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는 <태아의 잠>(문학과 지성사, 1992), <바늘구멍 속의 폭풍>(문학과 지성사, 1994), <사무원>(창작과비평, 1999), <소>(문학과지성, 2005), <껌>(창작과비평, 2009), <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 2012), (멕시코 보노보스, 2012, 스페인어 번역 시집) 등이 있고, 저서로는 동시집 <방귀>(비룡소, 2007), 그림책 <꼬부랑 꼬부랑 할머니>(비룡소, 2008), <소가 된 게으름뱅이>(비룡소, 2011) 등이 있습니다. 시인이면서 짬짬이 동시도 쓰고 또 동화를 번역해 내기도 했습니다. 1995년 김수영 문학상, 2001년 현대문학상, 2004년 이수문학상, 2004년 미당 문학상, 2006년 지훈문학상, 2009년 상화시인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김기택 시인은 일상과 사물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특유의 무섭도록 정밀한 묘사와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특징인, [관찰과 묘사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세 번째 시집에 실린, 오늘 감상하는 이 시는 교과서에도 실린, 그의 대표적인 시입니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불교 수행자의 고행에 빗대어 재미있게 표현함으로써 30년 긴 인생을 오롯이 사무실에서 주체적인 의식 없이 기계적인 행동만 반복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시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기계적인 행동들은 부정적인 현실의 이미지인데 반하여, 그것을 종교적인 수행 언어로 비유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반어적인 시어들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이 시를 감상하는 포인트입니다. ‘청아하고 구성지게’, ‘깊은 경지’, ‘용맹정진’, ‘굽실굽실 108배’ 등과 같은 시 속의 긍정적인 표현들은 시 속의 화자가 처한 부정적인 현실을 반어적으로 묘사하는 시어가 되어 서글픔 같은 느낌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이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한없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더욱더 서글퍼지는 구조입니다. 시인이 이 시를 통해서 노리는 풍자와 반어적 표현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장치입니다. 그리고 시 속의 인물도 내가 아는 어떤 구체적인 사람이나 시인 자신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사물화(事物化) 된 일반적인 현대인을 나타낸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와 같이 시종일관 간접 화법을 동원했다는 사실입니다.
몇 주 전, 오래 전에 다른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던 후배 직원으로부터 안부를 묻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번에 사직을 하게 되었다면서 자기가 사표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20년 전, 같은 부서에서 함께 근무도 했던 적이 있고 또 친하게 지내 온 터라, 갑자기 사직하게 되었다는 말에 깜짝 놀라 ‘명예퇴직을 신청했느냐’고 물었더니 퇴직이 꼭 명예퇴직만 있는 줄 아느냐며, 깨끗하게 사표를 썼다고 했습니다. 당시 이곳을 떠나 자신이 졸업한 모교의 교직원으로 갈 때의 상황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적이 걱정이 되어 이런 저런 사연을 더 나누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지게 되었고, 그 이야기 끝에 그가 ‘좋아하는 시’라면서 불쑥 제게 보내 준 시가 바로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시입니다.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나니까 너무도 홀가분하고 기분이 상쾌하다고까지 표현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이 시를 읽었더니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너무도 씩씩한 어투로 '속이 시원하고 통쾌하다'고 말하면 할수록 마치 시인이 번어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몇 십 년을 마치 도를 닦는 수행자처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용맹 정진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겠다고 사표를 쓰는 마음이 어찌 그리 통쾌하고 시원하기까지야 했겠습니까.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수행 정진하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손익관리대장경’이나 ‘자금수지심경’을 읊으면서 장좌불립 혹독한 수행을 30년 쯤 하고 남는 것이라고는 다름 아닌 ‘사표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뿐이라는 현실이 그저 슬펐습니다.
그가 사직서를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 전 어느 지인이 보내 준 시를 꺼내서 읽었습니다. 전윤호 시인의 ‘사직서 쓰는 아침’이라는 시입니다.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 먹히기 싫은 심정으로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 시집, <연애소설>(다시, 2005)
아마도 사직서를 쓰고 통쾌했다는 그 동료 후배의 심정도 이 시의 화자와 동일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자신의 모든 정열과 땀을 쏟아 부었던 직장을 떠나면서 어느 누가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요. 일단 한번 그런 결단을 하고 나면 이 시의 화자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한 벅찬 결기가 보이는 듯 하지만, 역설적이고 반어적인 ‘서글픔’이 묻어나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2년 후면 저도 33년간의 수행 기간을 마무리하고 속세로 나가야 하는 정년퇴직을 할 것입니다. 맘대로 하고 싶은 일 하고 또 맘대로 가고 싶은데 가는 ‘속세의 자유인’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때까진 제 스스로 먼저 정진을 그만 두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더 고행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코로나19 상황이 조금 수그러들면 먼저 사표를 던진 그 동료의 ‘행복 찾기 체험담’을 직접 만나서 들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용기 있는 결단에 맘껏 축하를 보내고 또 아낌없는 응원도 해주고 싶습니다. 비록 나 스스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에 매몰되어 사람들이 ‘그리 부르든 말든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하기도 하고 또 청아한 염불을 외워대기도 하면서 장좌 불립 수행에 파묻혀 있지만 말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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