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좌우에 대한 숙고 - 정한용

석전碩田,제임스 2020. 9. 16. 06:30

좌우에 대한 숙고

                              - 정한용

몇 년 전부터 노안인가 싶더니, 이젠 안경이 잘 안 맞는다. 양쪽이 서로 어긋난다. 왼쪽으로 보는 세상은 흐리지만 부드럽고 따뜻한데, 오른쪽으로 보는 세상은 환하지만 모가 나고 차갑다. 둘 사이의 불화와 냉전에 속앓이가 심했는데, 알고 보니 오래 쌓인 원한이 있었다. 수구와 진보의 싸움은 식상한 것이 되었고, 훈구와 사림의 대립도 짓물렀다. 정상과학을 두고 벌인 칼 포퍼와 토마스 쿤의 논쟁에 대해서는 논문으로 까발린 적도 있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리영희 선생께서 일갈했지만, 나는 차라리 두 세상을 따로국밥처럼 몸속에 나눠놓고 살겠다. 왼쪽 눈이 쓰린 날은 막걸리에 해물파전을 먹고, 오른쪽 눈이 부신 날은 소주에 삼겹살을 먹겠다.

- 시집 <거짓말의 탄생> (문학동네, 2015)

* 감상 : 정한용 시인.

195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초극지의 구조적 현현’이 당선되었고 1985년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1990), <슬픈 산타페>(1994), <나나 이야기>(1999), <흰 꽃>(2006), <유령들>(2011), <거짓말의 탄생>(2015), 영문시집 (2015) 등을 냈으며, 그 외 저서로 <민족문학 주체 논쟁>(1989 편저), <지옥에 대한 두 개의 보고서>(1995 평론집), <울림과 들림>(2006 평론집) 등이 있습니다. 인터넷 문학동인회 [빈터] 대표를 역임했고, <정신과 표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한용 시인은 절제된 문장과 서정성을 확보하면서도 동시에 인간 사회의 모순 상황과 시대의 아픔, 고통을 풍자화 하는 시적 형상화와 상황 설정이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경인일보 [풍경이 있는 에세이] 칼럼에 오랫동안 글을 게재해 오고 있기도 합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평범한 신변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하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읽다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시인이 던지는 묵직한 화두의 핵심까지 도달하게 되는 묘미가 있는 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무거운 주제 속에서 헤매면서 뒹구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명쾌하게 결론을 지은 후 빠져 나오는 깔끔함도 느껴지는 시입니다. 연 구분 없이 산문시 형식으로 길게 배열했지만 굳이 연을 나누라고 해도 누구나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화두의 제기, 그 문제의 역사적 고찰, 그리고 결론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년 전부터 노안인가 싶더니 좌우 눈이 영 잘 맞지 않는다고 넋두리를 하면서 시는 시작이 됩니다. 왼쪽 눈은 흐릿하고 오른 쪽 눈은 밝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이니 아무리 안경을 써서 교정을 해도 맞지 않습니다. 시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제 이야기를 이 시인이 어떻게 알고 썼을까 의아심이 들 정도로 바로 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으로부터 2년 전, 가을쯤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배드민턴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오른 쪽 눈 속에서 시꺼먼 물체가 왔다 갔다 하면서 시작된 눈의 이상 증세는 결국 찢어진 오른 쪽 눈의 망막을 다시 꿰매는 대수술로 이어졌습니다. 망막 박리 수술을 하고 나면 반드시 오게 되는 백내장 증상을 예방하기 위해 백내장 수술을 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왼쪽 눈은 ‘정상적인 눈'으로 흐릿하고, 오른쪽 눈은 렌즈를 삽입하여 밝아졌지만 가까운 곳만 보이는, 영락없는 짝짝이 눈이 되어 아무리 교정을 해도 불편한 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은 중년 이후에 누구나 겪게 되는 이와 같은 양쪽 눈의 문제로 운을 뗀 후, 슬쩍 ‘좌우의 대립’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수구와 진보의 문제, 그리고 냉전의 속앓이, 나아가 과학의 영역에서 칼 포퍼와 토마스 쿤으로 대표되는 학문적 쟁점에 이르기까지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닌 ‘서로 대립하는 현상’을 탁자 위에 올려놓습니다. 요즘처럼 '촛불과 태극기'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서로 갑론을박하며 갈등을 표출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좌우 두 개의 눈을 정치적 입장의 ‘좌우’가 대립하는 현상으로 '시적 은유'를 삼은 것입니다. 짧은 문장 속에 어쩌면 이 모든 대립 현상을 함축해서 표현했을까 싶을 정도로, 시인의 안목과 문장력이 탁월하기도 합니다.

회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명저를 남긴 칼 포퍼, 그리고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새로운 학문적인 개념을 소개했던 토마스 쿤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박사학위를 받은 시인도, 이 정도는 그들의 논문을 통해서 그 개념을 알았다는 의미로 정상과학을 두고 벌인 칼 포퍼와 토마스 쿤의 논쟁에 대해서는 '논문으로 까발린 적도 있다’고 일갈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대립이 너무도 소모적인 싸움이라는 사실을 그가 선택한 시어들을 통해서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식상한 것이 되었고’, ‘짓물렀다’, ‘까발린 적도 있다’ 등이 바로 그 표현들입니다. 모두 다 과거의 낡은 유물이라는 뜻으로 ‘과거 시제’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런 다음 시인은, 이 시의 마지막 연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시작하면서 ‘리영희’라는 한 사회운동가의 실명을 거론합니다. 소위 진보 인사로 분류되는 리영희도 좌우가 대립하는 우리 현대사를 보고 그 해결책으로 제시했던 유명한 말을 소개하고 싶은 시인의 간절한 심정이 내비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지만, 시인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차라리 두 세상을 한 몸에 넣고 다니면서 ‘왼쪽 눈이 쓰린 날은 막걸리에 해물파전을, 오른쪽 눈이 부신 날에는 소주에 삼겹살을 놓고’ 따로국밥집에서 거나하게 함께 어울리겠다며 너스레를 떨며 결론을 맺습니다. 짧은 한 편의 시 안에 실로 대립의 역사, 아니 대한민국의 긴 역사가 한 눈에 보이는 듯 하고 또 그 해결책마저도 깔끔하게 정리하는 듯해서 속이 후련할 정도입니다.

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중국 청나라의 문장가인 장조(張潮)가 쓴 <유몽영(幽夢影)>이라는 잠언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다만 그 하나를 알고 오직 그 하나에 그치게 될까 두려워하는 사람이 상(上)이다. 그 하나를 아는 데 그치고 다른 사람의 말로 인하여 비로소 그 둘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다. 그 하나를 아는 데 그치고 다른 사람이 그 둘이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그 다음이다. 그 하나를 아는 데 그치고 그 둘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이 하(下) 가운데 하이다.'

쪽 눈이 불편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보지 못해서 불편한 사람의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장조의 말처럼 하나만 알고 다른 한 쪽을 몰라도, 적어도 그 다른 한 쪽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세상만사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듯합니다. 최상이나 그 다음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아는 한 가지에 그치고, 다른 한 쪽이 있다고 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그래서 좌우의 극한 대립을 조장하는 ‘최하(最下)’만은 절대로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의 계절인 이 가을에 읽을 책으로, <명심보감>, <채근담>과 더불어 동양의 3대 잠언집이라고 하는 장조(張潮)가 쓴 <유몽영(幽夢影)>을 권합니다. 잠언집이므로 늘 곁에 두고 몇 구절씩만 읽어도 여유로운 삶의 지혜와 비결, 그리고 마음의 양식까지도 얻게 될 것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