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네비게이션 / 꿈의 비단길 - 홍종빈

석전碩田,제임스 2020. 8. 26. 06:38

네비게이션

                                         - 홍종빈

자동차를 몰고 나서면
어느새 아내가 네비게이션 안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또박또박 하느님처럼 말한다.
전방에 과속방지턱이 있습니다. 안전운전 하십시오.
그녀가 시키는 대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보이지 않는 아내가 다시 말한다.
전방에 과속단속구간입니다. 과속에 주의하십시오.
나는 언제나 길들여진 의식으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어디로 갈까 묻지 말고
그림자처럼 오롯이 따라만 오세요.
당신이 한평생 건너온 그 질퍽하고 굴곡진 삶도
거역할 수 없는 내 힘에 이끌려 왔듯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현관문을 열면 그녀가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마세요. 내가 심심합니다.
제발 담배 피우지 마세요. 내 건강에 해롭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내 포로입니다.

- 시집 <가시> (화니콤, 2011)

* 감상 : 홍종빈 시인.

경북 왜관에서 태어났고, <문학저널> 신인상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는 <2인3각>, <가시> (화니콤, 2011), <젓가락 끝에 피는 꽃>(지혜사랑, 2013), <꿈의 비단길>(지혜사랑, 2016) 등이 있으며 그가 평생 전업으로 일해 온 분야에서 남긴 저서로 <특수가축>, <흑염소 사양관리 기술>, <흑염소 기술교육> 등이 있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흑염소를 키우는 농장의 대표로 자수성가하여 현재는 <한솔 목장>과 <홍종빈 축산 아카데미>대표입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시의 세계에 입문, 시인으로 등단하여 한국문인협회 대구시지회 회원, 경북도지회 회원, 칠곡문인협회 회원, 21C 생활문인협회 회원, 애지문학회 회원, 시나루 동인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늦깎이 문학도’로서의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평생 노동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터득한 것을 문학에 접목하면서 그가 늘 주장하는 것은, ‘시는 시인의 삶과 일치될 때 그 시가 훌륭한 시로 평가 된다’는 평범한 신념입니다.

전을 하는 사람이면 네비게이션의 고마움을 잘 압니다. 요즘은 처음 네비게이션이 세상에 선을 뵐 때와는 더 많이 발전하여 현재 교통 정보까지 감안해서 길 안내를 해 주는 프로그램들이 개발되면서 잘 아는 길도 반드시 시동을 걸기 전에 네비게이션부터 정확하게 설정을 하고 출발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에서 시인은 네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를 아내의 목소리로 ‘시적 은유’를 상정하고 한 편의 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집을 나설 때면 항상 운전 조심하라고, 과속하지 말고 안전운전 하라고, 그리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아내의 음성이, 마치 운전 중에 네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음성과 닮아서일 것입니다. 미리 미리 알려주는 안내 음성이 틀림없고 정확하여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 보니 이제는 그 음성은 하나님의 그것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고 절대로 거역할 수 없어 그 음성의 포로가 되었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고객이 내비게이션 회사의 게시판에 ‘네비게이션에만 의존하다 보면 한평생 길치에서 못 벗어난다.’는 불만 섞인 글을 남겼더니 그 다음날 회사 측에서 다음과 같은 댓글로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한평생 길치 되면 일평생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말하자면 네비게이션의 포로가 되면 된다는 말입니다.

30년 전 신혼 시절, 아내와 함께 미국이라는 땅이 진짜 있는지 한번 확인해보자며 처음으로 미국 서부 여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해외여행을 하기 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여행하고자 하는 그 나라 그 지역의 지도를 입수하는 일이었습니다. 학교 앞에 있던 ‘신발끈 여행사’라는 후배가 운영하는 조그만 여행사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여행 준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드디어 현지에 도착하여 차를 렌트하고 가고자 했던 곳을 커다란 지도책을 보며 찾아 갔던 첫 미국 여행의 추억이 아련합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아내가 했던 일 중의 하나는 지도를 보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우리가 만나는 모든 도로의 번호와 방향,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방향 전환을 해야 할지를 일일이 메모해서 운전하는 제게 알려주는 역할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네비게이션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다 불과 몇 년 후, 두 아들까지 데리고 온 가족이 다시 미국을 찾았을 때에는 두꺼운 종이로 된 지도책은 이미 필요가 없었습니다. 렌트 카 회사에서 제공하는 [Where 2(to)]라는 성능 좋은 네비게이션만 있으면 어디든 정확하게 안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행하는 내내 그 편리한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게이션에서 흘러 나오는 음성은 상냥하고 똑똑한 여비서처럼 어느 상황에서건 화내지 않고 최고의 친절한 태도로 안내를 해 줍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 틀린 말을 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세간에는 이런 농담도 있습니다. 즉, 남자가 태어나서 죽기까지 잘 살기 위해선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여자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네비게이션이 없이 어디를 찾아간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네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나 아내의 말이 ‘당신은 내 영원한 포로‘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로 과장된 표현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을 마무리하기 전에 늦은 나이에 시의 세계에 입문하여 맹렬히 그 길을 달려가고 있는 홍종빈 시인의 또 다른 시 하나를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나이가 들어보니 이제야 삶을, 인생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죽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에 공감이 갑니다.

꿈의 비단길

                                                  - 홍종빈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겨우 몇 뼘 남지 않은
저물녘에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길은 내 마음을 거처가고 있다는 것을
그 길에 피고 지는 것이 장미꽃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적시고 가는 것이 단비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훑고 가는 것이 봄바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섶에 우는 것이 뻐꾸기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은 돌고 돌아 다시 원점에 가 닿는다는 것을

일생을 두고 한결같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맸던 꿈의 비단길이
내가 나날이 허둥거리며
허투루 밟고 지나온 그 길임을
땅거미가 내릴 때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나마 어두워지기 전에

- 시집 <꿈의 비단길> (지혜, 2019)

의 비단길이라고 했지만 시인이 깨달은 것은 엄청나게 화려하고 큰 것도 아니고 무슨 뾰족한 묘수나 기적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허투루 지나 온 평범한 그 길’이 바로 '꿈의 비단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시인에게 허락된 시간이 ‘겨우 몇 뼘 남지 않은 저물녘에서야’ 그것을 조금 알게 되었지만 그나마 아주 어두워지기 전이라 천만 다행이라고 고백하는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소재들을 가지고 주옥같은 시편을 건져 올리는 말년의 그의 삶이 너무 좋아 보입니다. 삶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길, 그리고 매일 매일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들려오는 아내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 듣듯, 그녀의 ‘자발적인 포로’가 되어 살면서 작은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