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긴 아깝고
- 박철
일면식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 시집 <작은 산>(실천문학사, 2013)
* 감상 : 박철 시인.
1960년 1월, 서울 강서구 개화동(당시에는 김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성남고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87년 <창비 1987>에 ‘김포’외 1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김포행 막차>(창비, 1989), <밤거리의 갑과 을>(실천문학사, 1992), <새의 전부>(문학동네, 1994), <너무 멀리 걸어왔다>(푸른숲, 1996),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문학동네, 2001), <험준한 사랑>(창비, 2005), <사랑를 쓰다>(열음사, 2007), <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2009), <작은산>(실천문학사, 2013),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창비, 2019) 등이 있으며 소설집으로 <평행선은 록스에서 만난다>(실천문학사, 2006)가 있습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문화일보 객원기자로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8년 단국문학상, 2009년 천상병 시상, 2010년 백석문학상, 2018년 노작문학상, 2019년 제16회 이육사 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009년에 펴낸 시집 <불을 지켜야겠다>(문학동네)로 그는 백석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백석문학상은 ‘시인 백석(白石)의 뛰어난 시적 업적을 기리고 그 순정한 문학정신을 오늘에 이어받기 위해 백석의 젊은 시절 사랑했던 사람인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가 출연한 기금으로 1997년 10월 제정되어, 해마다 최근 2년 안에 나온 뛰어난 시집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예심과 본심을 거쳐 최종 수상자가 결정되는데 박철 시인이 수상할 당시 본심의 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시인 도종환은 그를 선정한 후 심사평을 이렇게 썼습니다.
‘박철의 시는 외롭다. 박철의 시는 대로변에 있지 않고 가등 희미한 골목에 있다. 그는 큰 목소리로 앞에 나서지 않고 헛개나무 뒤에 슬며시 숨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의 시는 가난하고 우수에 가득 차 있다. 그의 시는 치열하지 않다. 모두들 뜨겁게 살기 위해 달려갈 때에도 그는 여전히 천천히 간다’
도종환 시인의 말대로 박철의 시는 과장된 허풍이나 격앙된 목소리가 없습니다. 거짓이 없고 솔직하며 순정이 있습니다. 그가 처음 시단에 나왔을 때는 어떤 사람은 그가 신동엽을 닮았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김수영이 돌아왔다고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시를 쓰는 전업 작가로 살아온 그가 겪어내야 했던 삶은 순탄치 만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 오롯이 ‘전업 시인’으로 살아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건 누구나 다 아는 현실이니 말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를 다 읽고 난 후 갑자기 ‘웃음이 날 정도로 재미있었다’고 표현한다면 시인에게 실례되는 표현일까요. 버리긴 아까운 걸 서로에게 받은 쌍방이 ‘이상한 눈빛을 주고 받는’ 모습에서 뭔가 야릇한 연민의 정 같은 것을 느끼면서도, 그 뭔가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 서로가 ‘동병상련의 인정 넘치는’ 썸을 타는 광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시인이 처음 시집을 낸 후 심리적으로 겪었던 상황을 시로 표현한 듯 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유명한 평론가에게 자신의 시집을 보내려고 근사하게 서명까지 한 후 막 보내려던 참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스스로 자존심이 많이 상했나 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비루해지면서 글을 쓸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 그래서 그는 그만 서명을 했던 면지를 북 찢어내고, 책 보내는 걸 포기했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느낌,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집의 찢겨진 면지를 보니 마치 자기의 마음이 찢어진 듯하고 또 스스로 지켜내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에 금이 간 것 같아 괜히 슬퍼집니다. 그래서 가끔 들르는 식당의 여주인에게 가서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한번 읽어나보라고 슬쩍 건네는 시인의 모습이 슬프게 다가오는 시이지만 한편으론 맛깔스럽기도 합니다. 서로 이상한 눈빛을 주고 받는 ‘버리기 아까운 사이’로 급반전 마무리되는 익살스러움이 아마도 웃음이 터지도록 한 이유일 것입니다.
‘버리긴 아깝다’는 말은 정중하게 생색내듯 주는 게 어설프기도 하고 또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마음이 들어있는 표현입니다. 근데, 시인은 그냥 ‘버리긴 아깝다’는 말만 한 게 아니고 ‘여차 여차하여’ 앞뒤 상황 설명까지 했습니다. 그 여차여차한 이야기 속에는 자신의 현재 처지며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심정적인 마음 상황까지도 당연히 포함해서 말했을 터입니다. 며칠 뒤, 그것도 화창한 날이 아니라 비 오는 날 ‘그 버리긴 아까운 시집’ 덕분에 뜻밖의 ‘아귀찜’ 대접을 받았습니다. 식당 여주인도 그가 했던 말, ‘버리긴 아깝고’라는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식사에 초대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집이라는 특별한 선물을 받고 그 고마움을 시인의 방식으로 표현한 식당 주인은 어쩌면 직접 시를 쓰지는 않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삶의 달인, '삶의 시인'임에 분명합니다. 이 쯤 되면 이 시집은 충분히 그 출판된 소용을 다 한, 멋진 시집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은 시집이 되었든, 자신의 글을 묶어서 내는 자전 에세이집이 되었든 누구나 책을 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책을 내서 수익금이 생기지 않아도 자신이 살아 온 삶을 정리하고 또 그동안 SNS에 써 온 글들을 묶어서 기념으로 책을 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겨냥해서 출판업계에서도 그에 맞는 기획 출판을 해 주고 있습니다.
책을 내는 방식에는 자신이 소요경비를 모두 부담하는 자비 출판과 상업적 판매를 염두에 둔 출판사의 기획 출판이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가 전통적인 책 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여전히 좋은 필자와 좋은 콘텐츠를 찾는 것이 출판사의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SNS의 발달로 인해서 종이로 만드는 출판 시장은 많이 위축되었고 더욱 힘들어 진 상황이라 새로운 필자 발굴을 통한 책 출판만 고집하다가는 출판 업계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비 출판’이라는 틈새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출판사들은 점점 더 늘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하겠지요.
얼마 전, 생명의 전화에서 오랜 세월 함께 봉사해 오던 지인 한 분이 책 한 권을 냈습니다. <길 위에서 쓴 일기>(SUN, 2020)라는 제목의 여행 에세이. 지난 봄, 소식이 끊긴 지 꽤 여러 해만에 다시 연락이 되어 제가 근무하는 학교까지 일부러 찾아오셨는데, 그 자리에서 10년 전 우리가 함께 여행했던 몽골 뿐 아니라 중국 내륙 지방을 다녀온 여행기를 글로 정리했다면서, 컴퓨터로 프린팅 한 원고를 제본한 얇은 책 한 권을 내미셨습니다. 몇 권을 복사해서 그동안 꼭 드리고 싶은 몇 분들에게만 드리려고 가져왔으니 시간 날 때 읽어보라고 놓고 갔습니다. 그녀가 떠난 후 그 원고를 찬찬히 읽으면서, 사실 저는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지난 수년 간 서로 알고 지내면서 그녀를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제본 된 원고 중간 중간 자신의 삶을 풀어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그리고 삶의 고비 고비 순간 순간에 그녀가 경험했던 느낌과 감정, 생각을 만나면서 '내가 한 사람을 그저 겉으로만 알았구나' 하는 자책을 했습니다. 전혀 모르고 그저 겉만 서로 알고 지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제본된 책를 읽으면서 그녀를 새롭게 알아가는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그 보다는 문장이 얼마나 탄탄하고 알찬지 한 숨에 끝까지 다 읽었을 정도로, 글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 저는 전화로 이 원고가 제대로 된 책으로 발간되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뿐 아니라, 삶의 길에서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겠다는 의견을 말했고 진짜 그래도 될 것 같으냐는 망설임에 강하게 한번 더 권했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그 대화가 단초가 되어 한 권의 책이 탄생되었다'면서 보내 온 책이 얼마나 귀하고 반가웠던지요.
‘이상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 받은’ 식당 여 주인과 시인의 경험을, 여행 에세이집을 배달 받고 저도 똑 같이 경험하는 행운을 누렸다고나 할까요. 비록 자비 출판으로 발간되는 책이긴 하지만 이런 멋진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면, 그리고 문장 마저도 이처럼 수려하고 알차다면 누가 뭐라하겠습니까. 아낌 없이 박수를 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심에,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무리하게 책을 내면서, 이 생에서 또 다른 나쁜 업(業) 쌓는 일을 겁 없이 감행하고 있는 슬픈 현실이지만 말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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