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벌초 / 터미널 - 이홍섭

석전碩田,제임스 2020. 8. 19. 06:32

벌초

                       - 이홍섭

벌초라는 말 참 이상한 말입디다. 글쎄 부랑 무식한 제가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큰 집 조카들을 데리고 벌초를 하는데, 이 벌초라는 말이 자꾸만 벌 받는 초입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 원 참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무던히 속을 썩여드리긴 했지만......조카들이 신식 예초기를 가져왔지만 저는 끝까지 낫으로 벌초를 했어요, 낫으로 해야 부모님하고 좀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고, 뭐 살아 계실 적에는 서로 나누지 않던 얘기도 주고받게 되고, 허리도 더 잘 굽혀지고......앞으로 산소가 없어지면 벌 받을 곳도 없어질 것 같네요, 벌 받는 초입이 없어지는데 더 말해 무엇 하겠어요, 안 그래요, 형님

- <시안> ( 2010 여름호), 시집 <터미널>문학동네, 2011)

* 감상 : 이홍섭 시인.

강원도 강릉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강릉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 대학원(석사), 그리고 동국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강원일보 기자로 일했으며 1990년 공모에서 시가 당선되었고,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서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1998년 <시와시학>젊은 시인상, 2011년 제1회 시인시각 작품상, 2012년 제17회 현대불교문학상, 제10회 유심작품상 시부분 수상, 2016년 강원문화예술상, 2018년 박재삼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시집으로는 <강릉, 프라하, 함흥>(문학동네, 1998), <숨결>(현대문학북스, 2002),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세계사, 2005), <터미널>(문학동네, 2011), <검은 돌을 삼키다>(달아실, 2017)와 산문집 <곱게 싼 인연>(해토, 2003) 등이 있습니다.

초(伐草)라는 뜻은 조상의 무덤에 난 풀을 깎고 또 야생 동물들이 파 놓은 산소를 손질도 하는 등 조상의 선영을 정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시의 화자가 된 주인공은 ‘벌 받는 초입’이라는 뜻으로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하면서 그동안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벌초를 조카들과 함께 처음하면서 느낀 마음을 표현해 내고 있는 시입니다. 살아생전 속만 썩여 드렸고, 그동안 한 번도 벌초를 하지 못했던 자신을 속죄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쉬운 독백형식으로 표현한 시가 공감이 갑니다. 속도와 효율을 앞세우자면 예초기가 낫겠지만 화자는 이왕 벌 받는 일이라면 뉘우칠 만큼 뉘우치도록 천천히 낫을 사용하여 벌 받는 마음으로, 뉘우치는 마음으로 풀을 깎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살아계실 적에 살갑게 나누지 못한 대화도 나눠가면서, 또 허리를 굽혀 바짝 다가가 그 음성을 듣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지막 표현인 ‘안 그래요 형님’이라는 문장이 이 시의 핵심이라면 핵심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 지금 독백처럼 말하고 있는 상대인 형님이 벌초에 함께 참여하여 바로 옆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형님마저도 이미 세상을 떠나서 산소에 묻혀 있어, 그 형님을 생각하면서 그의 묘에 난 풀을 정리하면서 그동안 살아생전 살갑게 서로 정을 나주지 못했던 것을 회한에 차서 얘기하는 것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전체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이제는 뭔가 달라진 모습으로 남은 삶을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드러나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시대가 더 변해서 ‘벌 받는 초입인 벌초하는 일이 없어지면’ 그 땐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형님과 나누는 대화조차도 할 수 있을까 한없는 서글픔으로 ‘혼잣말 대화’를 하는 형식의 시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난 주말, 35도 폭염이 내리 쬐는 날,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집안의 온 가족들이 모여 벌초를 했습니다. 새벽 출발 시간부터 내리기 시작한 서울 지역의 장대비 때문에 문경새재를 넘기 전까지는 이렇게 해서 현장에 제 시간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우중에 운전하느라 꽤 많이 힘들었지만 고향에 도착하니 쨍쨍한 하늘에, 폭염 주의보까지 내린 날씨여서 벌초하기에는 더없이 좋았습니다. 벌초를 다녀온 후 이런 상황을 어느 지인에게 말했더니, “후손들이 우애있게 좋은 마음으로 벌초를 하니 조상의 음덕이 보살펴 준 덕분”이라고 멋진 해석을 하시더군요.

년 전,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던 산소를 모두 파기하고, ‘숭조당’이라는 아주 독특한 이름의 납골 가족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행스런 것은, 그동안 벌초를 할 때마다 세 군데 장소로 흩어져 있는 수많은 분묘들을 감당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납골당을 마련한 후로는 풀을 깎아야 하는 면적이 좁아져 벌초하는 시간이 훨씬 졀약되었다는 점입니다. ‘숭조당(崇祖堂)’은 최근 많은 가정에서 화장을 한 후 유골 가루를 용기에 담아서 차곡 차곡 보관하는 형태의 납골묘와는 구별되는, 유골 가루를 보관하지 않고 한 곳에 부어 자연스럽게 땅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방식의 자연 친화적인 가족 납골당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 공간이 모자라 또 다른 납골묘를 마련해야 한다든지, 또 그것을 보관하고 관리할 때 해충들이 꼬일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땅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구조여서,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몸이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자연의 이치와도 딱 맞아 떨어진다는 의미에서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교의 가르침과도 통하는 것이지요. 우리 가족이 오랜 시간을 거쳐 합의하여 만든 이 독특한 ‘숭조당(崇祖堂)’이 앞으로 널리 홍보가 되어 다른 집안에서도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2천여만기의 산소 가운데 무연고가 절반 쯤 된다고 합니다. 세대가 바뀌면서 조상들의 묘를 돌보는 젊은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요즘은 화장을 한 후 유골 가루를 용기에 담아서 보관하는 형태의 가족 납골당들이 이곳 저곳에 생겨나면서 오히려 분묘보다도 더 애물단지나 공해가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다시 한번 우리 가족이 획기적으로 도입한 ‘숭조당’은 인간은 누구나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물 흐르듯이 받아들이는 시스템이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마다 벌초를 할 때마다 갖는 생각 중의 하나는, 벌초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것을 명분 삼아 가족들이 한데 모여 안부를 나누고 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부모님이 떠나시고 난 후에는 형제들조차도 서로 만날 기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벌초를 핑계 삼은 이런 가족 행사는 서로 협력해서 유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홍섭 시인의 ‘벌초’라는 제목의 시를 감상하다가 지난 주말에 있었던 우리 가족 벌초 행사 이야기를 언급하다 보니, 정작 이홍섭 시인에 대한 이야기가 자칫 곁길로 빠져버린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그의 대표적인 시집에 실린 아홉 편의 연작 시 ‘터미널’ 중에서 오늘 감상하는 벌초와 연관이 있을 법한 시 한 편을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 전승되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너무도 쉽게, 그렇지만 가슴에 울림이 있게 표현한 시가 다가옵니다. 삶의 현장에서 소재를 건져 올려 그것을 쉬운 단어를 사용하여 시로 표현하는 이홍섭 시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시입니다.

터미널

                         - 이홍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시집 <터미널> (문학동네, 2011)

은 아버지와 어린 자식, 그리고 그 자식이 아비가 되고 젊은 아버지는 다시 어린아이 같이 누군가가 돌봐주지 않으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늙은이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엄연한 현실을 매번 고향을 갈 때마다 두 부자가 이용했던 ‘터미널’이라는 공간과 과거,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파노라마처럼 그리고 있는 시입니다.

년만년 살 것 같지만, 언젠가는 앞서거니 뒷 서거니 하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벌초를 할 때마다 이 사실을 매번 확인하게 됩니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여기에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있을 때‘ 살갑게 서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한번이라도 더 갖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욱 소중합니다.

석이 다가오는 이 즈음, 그동안 집안 벌초 행사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면 올해엔 큰 맘 먹고 한번 동참해 보시는 건 어떠할는지요. - 석전(碩田)

 

* 숭조당 보기 : blog.daum.net/jamesbae/13410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