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도 시를
- 김수상
나쁜 꿈을 꾸었느냐? 예 나쁜 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꿈을 꾸었느냐? 제가 제 눈으로 똑똑히 본 일을 여럿이 있는 데서 증언해야만 그 일이 바로 서는 일이었는데 저는 침묵했습니다. 왜 침묵하였느냐?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입으로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울었느냐? 예 울었습니다. 왜 울었느냐? 그 사람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말을 더듬었습니다. 그런데 왜 울었느냐? 저보다 먼저 그 사람의 죄를 묻는 의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저보다 나아서 울었고 죄를 지은 그 사람이 또 가여워서 울었습니다. 무슨 죄이더냐? 사람을 죽였는데 죽일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 일보다 더 큰 죄는 자신을 속인 죄라는 생각을 꿈에서도 하였습니다. 그러고도 시를 쓴다고 했습니다.
- 시집 <사랑의 뼈들> (삶창, 2015)
* 감상 : 김수상 시인.
1966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영남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공부했습니다. 2013년 <시와 표현>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한 이후 <사랑의 뼈들>(삶창, 2015), <편향의 곧은 나무>(한티재, 2017), <다친 새는 어디로 갔나>(시와반시, 2019) 등을 펴냈습니다. 우먼라이프 기자로 일하다가 직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실직을 하는 경험도 했으며 현재 대구경북작가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습니다. 2015년, 올곧은 정신으로 치열하게 시 작업을 하는 시인을 지원하기 위해 제정된 <박영근 작품상> 제4회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수상 작품은 ‘미움은 미워하며 자라고 사랑은 사랑하며 자란다’는 제목의 시였습니다. 심사위원회는 그를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의 기교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를 초월해, 외롭지만 역사의 아픔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꿋꿋이 시의 미덕과 참다운 도리를 다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근대 개항기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일제 강점기 친일, 군부독재 시대 광주의 5월까지 우리가 어설프게 유폐시킨 역사를 꼼꼼히 호명하여 현재, 더 나아가 미래에 접목하여 시의 진실한 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의 시를 접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시가 ‘맑다’고 말합니다. 시가 어렵지 않고 또 시적 은유를 뒤틀거나 비비 꼬지 않아 누구나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쉬운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울러 그의 시는 그의 이름을 읽고 사람들이 오독하여 ‘감수성’으로 읽는 것처럼 감수성이 풍부한 시를 쓰는 탓도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서 시 공부를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는 요즘입니다. 예전과 같이 시인이 되기 위해서 소정의 어려운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간신문의 신춘문예나, 유명한 시인의 추천을 통한 등용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관심과 노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시인이라고 명함을 내 보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또 쉽게 시인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시인이 된다는 것은 그 과정만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참다운 자세를 견지하는 게 힘들고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남자 나이 오십이면 모두가 다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김수상 시인이 첫 시집을 내면서 본격적인 시업에 뛰어 든 것도 그의 나이 마흔 아홉, 그러니까 오십을 바라보는 늦은 나이였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시인으로 살아가는 큰 결단을 한 자신이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내비치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마음을 고백하고 다짐한 시가 몇 편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먼저, 지난 2004년 한국시인협회회장으로 있을 당시 시인의 날에 ‘시인 선서’라면서 발표했던 김종해 시인의 시입니다. 그 다음은 시인이 되려는 사람이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접해 봤을 밀란 쿤데라의 유명한 시, ‘시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이 두 편의 시를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시인 선서
- 김종해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시詩이며, 거짓말 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 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 시집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문학세계사, 1990)
시인이 된다는 것
- 밀란 쿤데라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왜냐하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어린애처럼 작은 구구단곱셈 속에서
영원히 머뭇거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시인이 된다는 것은
항상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시집 <시인이 된다는 것>(세시,1999)
아마 김수상 시인도 이런 시들을 이미 다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어떻게 시인으로서 살아내야 하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늦은 나이인 마흔 아홉 살에 첫 시집을 내면서 시인의 길로 접어든 자신이 그 자세와 그 본분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얼마나 고민과 생각을 많이 했으면, 오늘 감상하는 시와 같은 꿈을 다 꿀 정도였을까요. 꿈속에서 자신이 변호해야 할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했고, 시인이 생각해도 죽일만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답답하고 안타까와 하고 있는 것은 시인 스스로 답해야 할 ‘바로 그 적확한 때’에 말하지 못한 죄, 즉 자신을 속인 죄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생명과도 맞바꿔야 할 정도로 진실을 노래하는 시인이기에 김종해 시인은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고 서슬이 퍼렇게 외치고 있는데 시인은 꿈속에서 그가 불쌍하고 안타까와 울기는 했지만, 꿀 먹은 벙어리 마냥 먼저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그만 그 시간을 놓치면서 결국 ‘자신을 속이는 죄’를 범했으니, ‘그러고도 시를 쓴다고 말했 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럽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수상 시인은 경북 의성 출신이긴 하지만, 이제는 어쩌면 제 고향인 별고을 ‘성주’와 더 가까워 진 시인이라고 말해야 할 듯 합니다. 이쯤에서 그의 두 번째 시집에 그를 소개하는 글을 바탕으로 간략하게 시인의 근황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그가 성주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왜 성주와 더 가까운 시인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2002년 아내와 이혼 한 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초등학생인 아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자칭 ‘전업주부’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니던 직장이 문을 닫아 이것저것 생계를 위한 모색을 하였으나 쉰 즈음의 남자가 선뜻 뛰어들 마땅한 직장은 없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마지못해 ‘전업주부’로 살아가지만 이 말은 ‘자조적인 표현’만은 아니라고 그는 강조합니다. 가정에서 주부로서 아이들 챙기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공감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 일에 그 자신이 전혀 소홀함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에겐 여러 해 치매를 앓고 계신 아흔이 넘은 노모가 있습니다. 성주의 한 요양병원에 모셔두고 매 주말 면회 가서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병원과 가까운 성산에 800여 평 땅을 마련하여 귀농교육도 받고 작목이 비교적 수월하다는 대추나무도 몇 그루 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작황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직업이 농사짓는 일이란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주소 이전도 마쳤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마련한 땅에서 불과 2㎞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드가 들어온다는 발표가 났습니다. ‘날벼락’을 맞은 다음 날 그는 성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수줍음 잘 타는 말랑말랑한 감수성이 넘치는 시인 김수상은 사드 반대 투쟁을 이끄는 투사가 되었습니다. 울고 싶은데 뺨을 후려친 격이었다고나 할까요. ‘사드배치철회 촛불문화제’에 꼬박꼬박 다니면서 시를 쓰고 군중 앞에서 여러 차례 시를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격정에 몸을 맡기면서 점점 분노가 치밀었고 시의 내용도 강해졌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시를 읽으면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에게 ‘사드 시인’이란 별호가 주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문단으로부터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유명세(?)를 타면서 성주 군민들과 함께 글쓰기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답답한 속마음을 글로 후련하게 표현해보고 싶다는 할머니들이 한 달에 두 번 김 시인과 글공부를 했습니다. 집회를 거듭하면서 공동체 정신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연대의 정신들이 번뜩이는 현장을 그는 체험하면서, 밀란 쿤데라가 말했던 것처럼 시인으로서 ‘끝까지 가 보는’ 행운을 누렸던 것입니다. 사드가 가져다준 일종의 역설적 축복이라고나 할까요.
이쯤 되면, 시인의 시 끝 문장에 ‘그러고도 시를 쓴다고 했다’는 고백은, 자책이나 후회로 뒷걸음질 치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시인으로서 그가 나갈 삶의 방향이 완전히 정해졌다고 선언하는 ‘김수상 시인의 선서’로 받아들이면 될 듯 합니다. 그리고 시인의 이름이 그저 ‘감수성’만 풍부한 게 아니라, 잘 했다고 칭찬받는 사람이 받는 상복이 터진, ‘수상감’이 되길 응원하고 싶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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