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부도덕으로 살거다 - 손현숙

석전碩田,제임스 2020. 7. 15. 06:42

부도덕으로 살거다

                              - 손현숙

머리 실핏줄이 막혀서, 하도 기가 막혀서 덜컥 누워버린 늙은 엄마, 늙은 아버지가 병문안 오면 슬쩍 눈 흘기면서 대놓고“가소, 마”한다 그리고 곧이어 “부도덕한 늙은이!” 혼잣말인 척 짐짓, 다 들리도록 중얼거린다 천 번도 더 들은 저 말, 삼강오륜으로 중무장한 우리엄마는 지금 입만 살아서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있지만, 평생 부도덕했던 우리 아버지 팔순을 넘기고도 정정하게 훠이 훠이 세상 끝까지 마실 다닌다

나, 이제부터 무조건 부도덕하게 살거다 도덕 찾다가 늙어, 어느 날 뒷목 잡고 넘어가느니, 요놈의 사탕 같은 세상 실컷 빨면서 들통 나지 않게 시치미 딱 잡아떼고 치맛자락 살살 흔들면서, 살거다

부도덕한 늙은이! 그 누가 뭐라 뭐라 씹어도 끄떡없는 아버지, 지금 엄마 등 쓸어준다 발 닦아준다 에그그, 지금 저토록 행복한 엄마, 그러니까 나, 벽에 똥칠 할 때까지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오래 살거다 그렇게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인간답게 아버지처럼…, 인간답게 엄마처럼…,

- 시집 <너를 훔친다>(문학사상사, 2002)

* 감상 : 손현숙 시인.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신구대학 사진학과와 한국예술 신학대학 문창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지난 1999년 <현대시학>에 ‘꽃들은 죽으려고 피어난다’, ‘꽃 터진다, 도망가자’ 등의 시 4편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너를 훔친다>(문학사상사, 2002, <손>(문학세계사, 2011), <일부의 사생활>(시인동네, 2018)등이 있으며, 국내 주요 시인들의 스냅 사진과 시인들의 일상을 스케치 한 사진 산문집 <시인 박물관>(현암사, 2005)을 펴냈고, 유기동물들의 사진과 이야기를 담은 <나는 사랑입니다>(넥서스, 2012)가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동물자유연대가 그동안 모아 온 유기동물 사진과 손현숙 시인의 글이 만난 두 번째 ‘유기동물의 이야기’ <댕댕아, 꽃길만 걷자>(지식의 숲, 2019)가 출간되어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시인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에서 자연을 닮은 이웃들과 살면서 시작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에서 시인은 도발적으로 ‘부도덕으로 살거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부도덕의 반대말이 ‘도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인이 ‘도덕’을 거부하는 이유는 가족의 이력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부부관계에 있어 약자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 약자임에도 아버지가 주는 달콤한 사탕발림에 행복하다고 자신을 속이는 어머니(‘지금 저토록 행복한 엄마’),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고, 억압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오히려 자신을 도덕과 일치시키려는 어머니(‘삼강오륜으로 중무장한 우리 엄마’)와 적당히 부도덕하게 살면서 늙어서까지 ‘사탕 같은 세상의 단맛을 실컷 빨면서 들통 나지 않게 시치미 딱 잡아떼고’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시가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시인 자신은 이제 부도덕으로 살거라고 목소리를 높히는 것이 또 사뭇 의미심장합니다. 남편을 늘 부도덕하다고 말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부도덕한 늙은이’였던 아버지보다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곁에서 봐 온 시인은 '부도덕으로 살거다'라고 목소리를 한껏 높이는 것입니다.

인이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선언은,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뜻이며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강한 연민과 고통의 감정이 스며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머니를 ‘도덕의 굴레’로부터 구원해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 같기도 합니다. 서로 상충하는 아버지의 ‘부도덕’과 어머니의 ‘도덕’ 사이에서 시인이 찾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시인이 말한 대로, ‘부도덕’일까?

인은 이에 대한 즉답을 피하고 일단 유보합니다. 마지막 연의 마지막 행, '인간답게 엄마처럼'이라는 표현을 보면 결국 시인이 말하는 그 답은, 인간답게 사는 것임을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인간답게 엄마처럼, 인간답게 아버지처럼’이라는 이 표현이 자꾸만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웬지 모르겠습니다.

간답게 산다는 게 어찌 보면 아슬 아슬 벼랑 끝에 선 것 같이 살아가는 삶일지라도 그 아슬 아슬한 벼랑을 딛고, 소소한 삶의 행복을 누리면서 이 땅에서‘오래’사는 것이야 말로 병들어 골골하면서 세상을 한탄만 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잘 사는 삶임을 암시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등신 같은 엄마이지만, 삼강오륜 끝까지 따지지 않고, 현실에서는 '지금 여기서'(here & now) 살갑게 대해 주는 남편이 고마워 평생 상다리 휘어지게 차리면서 행복을 찾아가는 그 모습도 어쩌면 현실적인 '인간다운 모습'은 아닐까도 생각이 듭니다.

진을 전공하고 또 사진 산문집을 낼 정도로 수준급의 사진 실력을 갖고 있어서인지 손 시인의 시를 보면 마치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인의 또 다른 시 한 편은 오늘 감상하는 시의 후속 편이라고나 할까요. 그 이후 10여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부도덕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아버지의 시침 떼기와 그 속임수에 속고 사는 건지, 모르고 사는건 지, ‘그 아버지’와 함께 오누이처럼 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마치 활동 사진을 연결해 놓은 파노라마 같이 그려내고 있는 시입니다.

공갈빵

                - 손 현숙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나,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신 같았어

그러면서 오늘까지 우리 엄마는 아버지의 밥 때를 꼭꼭 챙기면서 내내 잘 속았다, 잘 속였다, 고맙습니다, 그 아버지랑 오누이처럼. 올해도 목련이 공갈빵처럼 저기 저렇게 한껏 부풀어 있는 거야

- 시집 <손>(문학세계사, 2011)

원순 서울 시장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이 전해 진 지난 주 금요일 아침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으니까요.

그랬을까. 죽을 정도로 자기 앞에 놓인 문제가 그리도 크고 심각했던 것일까. 그리고 죽으면 모든 게 다 사라 없어진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앞에서 내내 먹먹하고 우울해야 했습니다. 도저히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그가 갖고 있는 도덕률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벼랑 끝에서 허망하게 자신의 삶을 던져버림으로써, 아슬아슬한 벼랑의 삶을 포기해 버리는 게 문제의 해결일까. 인생이 그런 벼랑을 걷는 것인 줄 이미 다 알고 있었을텐데, 실제 삶 속에서 막상 맞닥뜨리게 된다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까지껏 좀 ‘부도덕하게’ 살면서 ‘등신 같이 사는 게 뭐 좀 어때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는 없었을까.

인의 이 시를 감상하면서 다시 이런 저런 생각이 참 많아집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