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 마시라
- 오영재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검은머리 한 오리 없이
내 백발이 된다 해도
어린 날의 그 때처럼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내 죽어도 유한이 없어
통일 향해 가는 길에
가시밭에 피 흘려도
내 걸음 멈추지 않으리니
어머니여
더 늙지 마시라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내 어머니를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
오마니!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 감상 : 오영재 시인.
1935년 전남 장성군에서 교육자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강진에서 성장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16살에 강진 국립농업중학교(현 전남생명과학고) 3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형을 대신해 의용군에 입대한 뒤 월북했습니다. 평양 작가학원을 졸업하고 1989년 ‘김일성상’을 수상하는 등 시인으로 이름을 떨쳐 북한에서 계관시인이 되었습니다. 시집으로는 <행복한 땅에서>, 서사시 <대동강>, <철의 서사시> 외 수백 편이 있으며 1990년 <통일예술> 창간호에 남쪽에 있는 가족이 읽고 자신의 생사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글을 씀으로써 알려지게 된 시인입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실질적인 교류 중 하나로 이루어 진 남북이산가족의 첫 상봉은 대한민국 근세사에서 두고두고 기억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 속에서 더욱 스폿 라이트를 받았던 사람이 바로 시인 오영재였습니다. 남한에 살아계신 어머니의 소식을 접하고 절절한 사모곡을 지어 발표했었지만, 끝내 생전에 만나지 못한 채 어머니의 영전 앞에 자신이 지은 사모곡들의 육필원고를 바치며 오열했던 오영재 시인.
1990년 재미 문인 김영희씨는 북한 방문 중 이북의 문인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한겨레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이 기고문에 오영재 시인의 사연이 실렸습니다. 오 시인의 동생 오형재는 그 사연을 읽고 형님이라는 사실을 즉각 알았습니다. 그 후 형재씨는 김영희씨를 통해 오 시인에게 편지와 가족사진을 전달하는 등 비록 간접적이지만 교류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곽앵순 씨)의 생존을 확인한 오 시인은 이듬해 5월 <아, 나의 어머니 - 40년 만에 남녘에 계시는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미주 지역의 문예지인 <통일예술>에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곽 씨는 1995년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연이 계기가 되어 이산가족 첫 상봉단 명단에 포함된 오영재 시인은 가족들이 들고 나온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면서 오늘 감상하는 이 시를 낭독했습니다. 울부짖음과 통곡 속에서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앳된 나이에 헤어진 어머니를 이마에 서너 줄 굵은 주름이 패어 있고 얼굴이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린 늙은이가 되어 낭독하는 모습은,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이남의 많은 국민들의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바로 이 시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신 분은,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저와도 같은 부서에서 함께 일을 했던 적이 있던 오근재 교수였습니다. 그러니까 오영재 시인의 친 동생입니다. 그렇게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집안에 이런 사연이 있는 줄 저는 미쳐 몰랐습니다. 정년 퇴직한 후, 이제야 오근재 교수에게 이런 사연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저의 무심함도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에, 괜히 죄스런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이 참에 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야 할 듯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18번으로 불렀던 노래가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였습니다. 자신이 자랐으며 또 어머니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을 시집을 온 후 부모님 살아생전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으니 오죽 그 마음이 답답했을까요. 어머니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 안타깝고 절절한 마음을 달랬던 것입니다.
젖먹이였던 한 살 무렵 고향인 합천군 야로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부모님을 따라 낯선 곳으로 간 어머니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민 2세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말 보다는 일본어가 더 익숙하였지요. 어머니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일본 나라현(奈良県) 신조정(新庄町)은 당시 한국에 있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가끔씩 일본을 드나들면서 돈벌이를 하셨던 아버지가 머물렀던 곳은 일본의 중부 지방, 그것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 니카타(新潟)였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奈良)까지는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아버지는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시간이 나면 그 먼 곳까지 내려가곤 하셨는데, 그런 과정에서 어머니를 소개받아 만나게 되었고 또 결혼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한국으로 따라 온 어머니는 완전히 생소한 한국의 상황에 엄청난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 이미 수세식 화장실이 있던 일본이었는데, 시집을 온 경상도 산골 성주 골짜기에는 전기는커녕, 화장실도 변변치 않아서 뒷 마당에 쌓아 둔 거름무더기 옆에서 일을 보고 짚이나 재를 이용해서 뒤처리를 해야 할 정도였고,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유교 양반 문화에서 지켜내야 할 각종 관습과 인습들은 너무도 많아서 말도 잘 모르는 새 며느리에게는 ‘충격’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일찍 혼자가 되신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그리고 ‘효도’가 최고의 덕목으로 알고 원리 원칙을 지키는 '효자 남편' 틈바구니에서 숨 쉴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 당시 어머니의 처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불렀던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항구에서 울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노랫말로 시작되는 유행가 가사는 저 현해탄을 건너 어머니, 아버지에게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자 절절한 사모곡이었던 셈입니다.
아마도 그 시절, 어머니가 이 시를 읽었다면 눈물 콧물 다 흘리며 통곡을 하면서 낭독을 했을 것입니다. 늙지 마시라/더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통일되어/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이 날까지 늙으신 것만도/이 가슴이 아픈데/세월아. 섰거라./.....
2006년, 어머니는 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떠난 4년 후,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불과 몇 해 전이라고 기억되는데 벌써 18년, 14년이 흘렀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엄마의 젖가슴 만지기를 좋아했던 저는 다 성장한 중고등학생 때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제가 결혼을 하면서 젖가슴을 만지는 대상은 달라졌지만, 막내인 우리 부부와 같이 사는 걸 바라셨던 부모님 덕분에 두 분이 별세하시기 전까지, 18년을 함께 살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저에게나 제 아내에게는 그 ‘함께 했던 시간’이 큰 행운이요 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영롱해지는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북 정상이 몇 차례 만나는 등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다가 최근 갑자기 급랭이 된 남북 관계가 2000년에 합의 된 <6.15 공동선언>이 무색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최대 염원인 통일이 이루어져, 이 한반도 땅이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서로가 평화롭게 공생 공영하는 날이 속히 오길, 이 보훈의 계절을 보내면서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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