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 이건청
곡마단이 왔을 때
말은 뒷마당 말뚝에 고삐가 묶여 있었다.
곡마단 사람들이 밥 먹으러 갈 때도
말은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꼬리를 휘둘러 날것들을 쫒거나
조금씩 발을 옮겨놓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묶여 있었다.
날이 저물고, 외등이 환하게 밝혀지고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말은 그냥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곡마단 곡예사가 와서 고삐를 풀면
곡예사에 끌려 무대에 올라갔는데
말 잔등에 거꾸로 선 곡예사를 태우고
좁은 무대를 도는 것이 말의 일이었다.
크고 넓은 등허리 위에서 뛰어오르거나
무대로 뛰어내렸다가 휘익 몸을 날려
말 잔등에 올라타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곡예사는 채찍으로 말을 내리쳐
박수소리에 화답해 보였다.
곡예사가 떠나고 다른 곡예사가 와도
채찍을 들어 말을 내리쳤다.
말은 매를 맞으며 곡마단을 따라다녔다.
곡마단 사람들이 더러 떠나고
새 사람이 와도
말은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꼬리를 휘둘러 날것들을 쫒거나
조금씩 발을 옮겨놓기도 하면서
평생을 거기 그렇게 묶여 있을 것이었다.
-<작가세계> (2014. 봄호), 시집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서정시학, 2017)
* 감상 : 이건청 시인.
1942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습니다. 한양대학교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단국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목선들의 뱃머리’가 입선, 이어 <현대문학>에 ‘손금’(1968), ‘구시가의 밤’(1969), ‘구약’(1970) 등이 추천되어 등단하였으며 한양대학교에서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난 2007년 정년퇴직하고 현재는 명예교수입니다.
시집으로는 <이건청 시집>(1970), <목마른 자는 잠들고>(1975), <망초꽃 하나>(1983), <하이에나>(1989). <코뿔소를 찾아서>(1995),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2000),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200&),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2010), <굴참나무 숲에서>(2012), 그리고 지난 2017년 그에게 김달진 문학상의 수상을 안긴 시집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가 있고, 기획 시집 <로댕-청동시대를 위하여>(1989)가 있습니다. 시선집(詩選集)으로는 <해지는 날의 짐승에게>, <움직이는 산>, <무당벌레가 되고 싶은 시인>, <이건청 문학선집>(전4권) 등이 있습니다. 내면 깊이 잠겨 있는 현대의 정신적 위기와 심연의 의식을 형상화하여 불안과 방황, 좌절과 열등의식 등을 의식 위로 길어 올림으로써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위무하는 시세계를 지녔다는 평을 받는 시인입니다.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녹원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제28회 김달진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그의 열한 번째 시집의 표제 시인데, 얼핏 보면 옛날 우리가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곡마단(曲馬團) 풍경을 아련하게 그리고 있는 듯 보이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는 화려한 곡마단과 그 화려한 무대 뒤편에 묶여 있는 한 마리 말의 존재를 통해서 뭔가를 노래하려고 하는 시인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그 의도’를 포착해 내는 것이 시를 감상하는 키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말뚝에 매여 있는 말 한마리, 그리고 가끔 무대에 등장하여 순서를 맡기는 하지만 그저 ‘매 맞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의 말의 현실을 나타내는 단어들에 먼저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인이 시적 은유로 삼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의 폭력적인 구조와 시간의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의 숙명론적인 동질성을 노래하고 있는 그의 의도 말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우리 인생 자체가 결국 ‘곡마단’이 벌이는 한 판의 연극 무대와 같다는 사실, 그리고 그 연극 무대 뒷마당에 하염없이 하염없이 묶여 있으면서 가끔씩 불려 나가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채찍에 맞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매일 묶여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말’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하루 종일, 그냥, 말은 매를 맞으며 곡마단을 따라다녔다. 평생을 거기 그렇게 묶여 있을 것이었다’ 등의 표현은 이 시를 전체적으로 우울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도 어쩌면 고통스런 경험을 반복하여 당하게 되면서 무기력해지고 좌절하여 결국 낙담 가운데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듯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축과 맨 자와 매여 있는 자 등 관계성을 섬세하고 미묘하게 그리면서 정확한 답을 내놓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저 시적인 은유로 변주해 내면서, 결국 그렇게 매여 있는 현실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고발함으로써, 힘없는 시인이 폭력적인 현실 세계를 맞서는 유일한 수단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해 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소리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들이 먼저 그것을 눈치 채 주기를 바라고 있는 듯합니다. ‘평생을 거기 그렇게 묶여 있을 것이었다’는 시의 마지막에 나오는 단정적인 문장이 온통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만, 그 우울의 극치가 바로 시인이 노리는 것임을. ‘세상의 상처와 아픔을 감싸 안는 시인이 토해낼 수 있는 애정과 연민의 노래이며 승화의 노래’라는 것을, 소리 없이 부르짖는 듯합니다.
현실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외적 요인 때문이라고 인식하여, 마치 ‘곡마단 사람들이 더러 떠나고/새 사람이 와도’ 자신은 ‘묶인 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채찍에 ‘매를 맞으며’,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있는 자유의 의지를 꺼내 활용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하염없이’ ‘평생을 거기 그렇게 묶여 있’게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마치 평생 산 위로 돌을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 스스로 자유하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삶 속에서는 각종 욕망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최고의 지식인 양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독선적인 무지(無知)와 아집에, 그리고 상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미움과 시기, 질투에 나 스스로를 묶어 놓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돌아 볼 일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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