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가 신문을 읽다
- 박재희
초여름이면 포도가 서서히 익어간다
농부는 포도에 신문지로 만든 봉지를 씌운다
빼곡히 적힌 기사들
푸릇한 포도송이에게도 철지난 신문이 배달되었다
세상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시끄러운 사건들이 포도알에 박힌다
푸른 눈알을 반짝여 본다
기름 냄새에 절은 눈알들
무엇일까? 무엇일까?
까막눈으로 읽고 또 읽고 …… 달포가 지나
오늘 신문에 자신이 주인공이 된
<**포도축제> 기사가 크게 났다
머지않아 그에게도 사건이 일어날 것 같다
감싸고 있던 신문기사를 북북 찢고
시끄러운 세상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 시집 <쟁기> (시와반시, 2007)
* 감상 : 박재희 시인.
1956년 경북 달성군 유가면 음리에서 태어나 <시와반시> 문예대학을 수료하고 2000년 <대구문학>으로 등단했습니다. 지금은 대구 비슬산 아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며 솔뫼문학회, 대구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쟁기>(시와반시, 2007), <연하장>(학이사, 2017) 등이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저의 시 감상문을 읽는 독자 분 중 한 분이 ‘다음 주에는 재미있는 시를 기대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요즘 한 주에 시 하나씩 꺼내서 읽는 시가 조금 무겁게 느껴진 건 아닌가 자책을 하면서, 계절에 맞으면서도 재미난 시가 어떤 게 있을까 찾다가 만난 시가 바로 오늘 이 시입니다. 사실, 지난 2019년 1월에 함께 읽었던 고영민 시인의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는 시를 읽은 후, 제 머리 속에는 ‘재미있는 시 = 고영민’이라는 등식이 각인될 정도로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시와 동일한 시적 은유를 적용하는 오늘 감상하는 시가 더 쉽게 제 눈에 띄지 않았나 생각됩니다.(http://blog.daum.net/jamesbae/1341066)
시인 고영민은 그 시에서 잎이 다 떨어진 겨울 산행 중 갑자기 똥이 마려워 급하게 자리를 잡은 후 용변을 보고 배낭을 뒤져 휴지를 찾는데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선물로 받은 어느 시인의 신작 시집 한 권이 전부. 고민하다 한 페이지를 북 찢어 밑을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구기고 구기고 또 구겨서 결이 부들부들해진 시집 종이를 갖다 대는데 ‘아, 부드럽게 읽혀진다’고 노래했지요.
오늘 감상하는 이 시도, 병충해를 막고 또 포도에 농약이 직접 묻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포도 송이를 일일이 종이로 싸는 작업을 하는데, 어느 농장에서 요즘 대부분의 농민들이 사용하는 흰색 종이 대신 신문지로 감싼 광경을 보고, 신문에 실린 뉴스들이 포도알에 알알이 박힌다는 시적 은유로 노래한 시입니다. 포도를 의인화하여 신문을 읽는다고 표현한 부분, 즉 ‘철지난 신문이 배달되었다’는 표현이라든지, ‘빼곡히 적힌 기사들을 읽어내는 포도알’ 등의 시어들이 고영민 시인의 은유와 닮은 점이 아주 많습니다. 기름 냄새에 절은 포도 알이 시인의 눈에는 까만 눈알, 즉 까막눈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보도하는 ‘영동 포도축제’기사 만큼은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포도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직은 푸릇한 열매들이 매달려 있지만 막 시작된 장마철이 끝나는 7월 중순부터는 ‘감싸고 있던 신문지를 북북 찢고 시끄러운 세상으로 튀어나온’ 올해의 포도 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년 전, 고향을 내려 가던 중 동네 어르신들에게 드릴 선물로 싱싱한 포도가 제격일 것 같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주변을 검색하여 찾았던 포도 농원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안성 부근이었는데 검색한 많은 농장 중에서 며느리 이름과 동일한 농장이 눈에 들어와 우리 가족 농장인 마냥 즐겁게 찾았던 농장, <예은포도농원>. 그 농원의 김정순 사장님은 지나가는 나그네가 내미는 신용카드를 보더니, 카드 결제기가 없으니 그냥 가라고 하실 정도로 낭만이 있던 분이었습니다. ‘돈은 나중에 보내 주면 된다’면서 오히려 홍보 명함을 잔뜩 건네주었습니다. 맛있는 포도를 생산하기 위해서 어디든 가서 배울 정도로 포도 박사가 된 여 사장님의 인생 스토리를 들으면서 시원한 원두막에서 먹는 막 딴 포도 맛은 일품이었습니다. 아마도 알알이 박혀 있는 그 농원의 포도 알들도 최고의 맛을 위해서 노력하는 주인의 마음과 노력을 먼저 읽어내고 합심해서 애를 쓴 탓이겠지요.
사실, 과일 농사를 짓는 농사꾼들 사이에는 일반인들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같은 이름의 과일이라도 누가 어떻게 재배했느냐에 따라서 그 맛이 엄청나게 차이가 날 정도로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다 같은 안성포도라도 같은 포도가 아니고, 또 다 같은 성주 참외지만 같은 참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가 얼마나 비싼 거름과 영양제를 썼느냐에 따라서 그 맛은 천양지차 달라진다고 하니, 농원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출하하는 이유가 분명 있는 듯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바흐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자란 포도는 유난히 탱글탱글하여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고도 말을 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 음악에 따라 와인 맛도 달라진다고도 말을 합니다. 또 된장을 만드는 어느 농원 마을에선 된장을 숙성시킬 때 주인이 직접 연주하는 첼로 음악이 영향을 미쳐 한층 더 깊은 맛의 된장을 만들어 낸다고도 하니 참 신기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미있는 시를 하나만 읽고 지나가기가 아쉬워 박재희 시인의 시 한 편을 더 읽어 보겠습니다. 아마도 이런 시를 읽어보면 앞으로 재미있는 시 등식에 ‘고영민’이라는 시인 이외에 ‘박재희’라는 이름도 하나 더 추가해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언어의 다중성이 가미된 묘미를 십분 활용하여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살벌한 장면이 시인의 눈을 통해서 금새 낭만이 가득한 세상으로 바뀌어 버리니, 시인은 탁월한 언어의 연금술사임에 틀림없습니다.
씨팔넘
- 박재희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좀 천천히 간다고 뒤따라오던 아들 뻘 되어 보이는 젊은 기사가 무슨 일이 그리 바쁜지 “씨팔넘”하고 횡 앞질러 갑니다
세상 구경하며 즐겁게 가는데 느닷없이 환한 얼굴에 후려갈기는 ‘씨팔넘’, 나는 억울한 마음에 뒤 따라가 뺨이라도 갈겨주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편으로 그 기사가 고맙기도 하네요
나이 오십 줄에 들면 그것이 잘 안 선다는데 나보고 씨팔넘이라니, 아직 힘이 남아있다는 칭찬 같기도 하네요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사람이나 짐승이나 고것 잘해 씨 팔려고 나온 것 아니에요?
모처럼 주머니가 두둑해진 밤
내 귀에 유난히 앵앵거리는 “씨팔넘!”
- 시집 <연하장>(학이사, 2017)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에게 욕을 하는 것 같은 제목이라 죄송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욕을 해야 할 정도로 화가 나고 답답한 힘든 현실을, 시인처럼 순간 참을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오히려 그게 더 고맙기도 하다'고 생각을 바꾸면서 살다보면, 모처럼 주머니가 두둑해 져서 한 잔 걸치고 온 날 밤, 귀에 앵앵거리는 그 긍정적으로 해석된 말 때문에, 늦둥이 하나 더 생길지 누가 알겠습니까?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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