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통화
- 서안나
지하철 안에서 사내가 목청을 높인다.
아 환장해 불겄네. 뭣이라고요. 사기꾼 이라고야. 아 참말로 환장해 불것네. 내가 세금 꼬박꼬박 내고 착하게 살아 불고 나쁜 짓은 안 해봤는디 사기꾼이라고요. 아따 선상 아무리 세상이 각박혀다고 혀도 내가 신용불량자가 되었기로서니 말씀이 너무 심허시오. 나도 처자가 있는 사람인디. 다음주엔 꼭 보내준다고 허지 않소. 나도 거짓말은 싫어하는 사람인디. 세상이 날 거짓부렁하게 맹근다 안 하요. 그 머시냐 문어 대가리 같은 김 사장이 부도만 안 내부렀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소. 기다려 달라고 암 생각 없이 그 말을 믿은 게, 신용사회를 믿은 게 내 잘못이구만. 뭣이라고요. 내일까지 갚아야한다는 말이요. 아, 참말로 환장해 불겄네. 내 말을 콧구멍으로 들은 거요. 발가락으로 들은 거요. 이보쇼. 아 이보쇼. 긍께 내일까지는 힘들당 게요. 이보쇼. 내가 돈을 맹글러 서울까지 왔응께 다음주까지만 기다려 주라고요. 아, 이보쇼.....이보쇼...
얼굴이 시뻘게지게 목청을 높이던 사내가 한숨을 쉬며 끄는 핸드폰. 지하철이 사내 얼굴만큼 벌겋게 달아올라 달리고 있다.
-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05년 가을호
* 감상 : 서안나 시인, 평론가. 1
965년 제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대전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한양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90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199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에서 소설부문 가작에 올랐습니다. 시집으로는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 등이 있으며, 동시집으로 <달에게 편지를 써 볼까>, <엄마는 외계인>,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등이 있습니다. ‘현대시’ ‘다층’ ‘시산맥’ ‘서쪽’ 등의 동인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계간 문예지인 <다층>의 편집장, 한양대, 홍익대, 협성대 등에 출강하면서 <대학국어작문>을 공저로 펴내기도 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시골에서 막 올라 온 남자가 지하철 안에서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목소리로 통화하는 대화를 귀담아 들었다가 그대로 받아 적은 듯한 내용으로 꾸며진 시입니다. 이것이 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얼굴이 시뻘게지게 목청을 높이던 사내가 한숨을 쉬며 끄는 핸드폰. 지하철이 사내 얼굴만큼 벌겋게 달리고 있다’는 마지막 문장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한 문장이 시적 은유가 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지하철 열차가 사내 얼굴만큼 벌겋게 달아올라 달린다고 표현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무례하게 고성으로 시끄럽게 통화를 한 사람에 대해서 참을 수 없어 화가 나서일까. 아니면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면 그 내용 중에, 통화하는 상대방이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이 남자와 같은 마음이 되어 안타까워서 함께 벌겋게 달아오른 것일까. 시의 마지막 한 문장에는 이런 여러 가지 은유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신의를 지키고 또 인지상정으로 관계하던 시대는 지나고 이제는 법과 제도의 틀 속에서 모든 관계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신용사회’라고 부릅니다. 말과 그 사람의 됨됨이가 큰 신용이었던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보다는 약속한 날짜에 정확하고 기계적으로 그 액수가 결제되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신용의 유무’가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시 속에 등장하는 사내는 바로 이런 시대적인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신용사회에 호되게 신고식을 치르는 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은 문어 대가리 같은 김 사장의 말을 그저 인정에 이끌려서 믿은 잘못 밖에 없는데, 자신과 정반대의 처지에 있는 통화 대상자는 소위 ‘얄짤없이’ 신용사회의 잣대로 일분일초도 봐주지 않고 자신을 ‘사기꾼’이라고 말하면서 그대로 부도처리를 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나도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세상이 날 거짓부렁하게 맹근다’는 사내의 말이 딱 맞는 말입니다. 착하게 사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인간적으로 아무리 ‘착해도’ 사회가 정한 법 특히 경제관련 법에서 정한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신용 불량자’가 되는 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입니다. 마음씨 착하게 살아가는 게 착하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을 잘 지키고 신용을 잃지 않을 정도로 깍쟁이가 되어야 착한 사람인 것입니다.
신용 사회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어디서나 그 사람의 신용을 보장해주는 ‘신용카드’일 것입니다. 처음 직장 생활을 하고 난 후 내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를 한 장 만들었을 때의 그 감격과 뿌듯함, 그리고 부자가 된 듯한 가슴 떨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용카드의 결제 원리를 잘 모르면 하루아침에 빚쟁이가 되어 버리는, 참으로 위험한 물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결제 능력을 초과해서 마구 써대다가 한 달 후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자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 되면서 경제에 비상등이 켜지며,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카드가 문제입니다. 당장 급해서 현금 서비스를 받았는데 다음 달 결제해야 할 금액을 은행 잔고에 남겨놓지 못하면 곧바로 파산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서안나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대체로 시들이 어렵다고 느꼈지만, 오늘 감상하는 시는 그런대로 쉽게 느낌이 다가오는 듯해서 그녀의 시집에 있는 여러 시 중에서 골라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한 편의 시로는 뭔가 아쉬운 듯해서 역시 마지막 한 문장으로 시적 은유를 활용하고 있는 같은 플롯의 시 하나를 더 읽어 보겠습니다.
위층 사는 그 여자
- 서안나
위층에 사는 그녀는
내 꿈이 어둠보다 더 견고해질 무렵 돌아온다
요란한 구두 굽 소리와 금속성의 열쇠로
내 꿈을 여는 그 여자
나에게 귀가의 순서를 외우게 하는 그 여자
날마다 술을 오지게 먹고 오는 그 여자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로 슬픔의 행방을 알려주는 그 여자
욕실 앞에서 멈추는 그 여자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여자
온 몸을 열고 방음되지 않은 슬픔을 토해내는 그 여자
자신을 스쳐간 손가락들을 욕실바닥에 꺼내놓는 그 여자
그리곤 큰 소리로 나의 슬픈 밤까지 엉엉 울어주는 그 여자
하수구로 흘러내리는 그 여자
흐르고 흘러 다시 맑게 피어나는 여자
몇 번 오가는 길에 마주쳤던 그 여자
늦은 오후 화사한 얼굴로 야단스럽게 집을 나서는 그 여자
세상의 어둠을 몸으로 끌어 담는 가죽부대 같은 그 여자
내 위층에 사는 곱슬거리는 긴 파마머리 그 여자
예수처럼 얼굴이 갸름한 그 여자
새벽마다 자신의 슬픔을 꾹꾹 밟고 오르는 그 여자
- 시집, <플롯 속의 그녀들>(문학과경계사, 2005)
그저 평범하게 위층에 사는 여자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문장을 여럿 나열하고 있는 듯 하지만 마지막 한 문장이 전체를 아우르는 공감으로 이끄는 구조가 비슷합니다. ‘새벽마다 자신의 슬픔을 꾹꾹 밟고 오르는 그 여자’라는 문장은 그 앞에 있는 여러 표현들과는 달리, 시인의 은유적 해석과 감정이 가미되어 앞의 모든 문장들을 한 줄로 꿰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지하철 안에는 ‘그 사내’가 있을 것이고, 또 어딘가 누군가의 위층에 사는 ‘그 여자’는 버거운 삶을 살아내고 있을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저들을 속이고 또 저들의 꿈을 앗아가는 이 어려운 시기일지라도 꿋꿋하게 버텨낼 수 있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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