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가을레슨 1 - 채희문

석전碩田,제임스 2020. 11. 25. 06:52

가을레슨 1

                              - 채희문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쯤은
떠나 볼 줄도 알아야지

좀 돌아서 갈 줄도 알아야지
좀 천천히 갈 줄도 알아야지

점점 높아지는 하늘
점점 얕아지는 땅
그 사이에서 점점 흔들리며 작아지는

새삼 느껴 볼 줄도 알아야지

떨어지는 잎, 다시 볼 줄도 알아야지
싸늘한 바람에 손만 흔들고 서 있는
나무들도, 다시 볼 줄 알아야지

좀 멀리 볼 줄도 알아야지
좀 가까이 볼 줄도 알아야지
깊은 것도
얕은 것도
함께 볼 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가을비
아침 이슬 같은 빗물로 만나
한 번쯤 썰렁한 가슴
젖어 볼 줄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쯤은...

- 시집 <가을레슨>(동천사, 1987)

* 감상 : 채희문 시인.

1938년 포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동성고등학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제 3회 외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1980년 <월간문학> 신인 작품상에 ‘겨울야영’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한국일보 기자, 주간을 거쳤고, 일간스포츠 편집부장을 역임했습니다. 저서로 <세계명작 영화 100년> 그리고 시집으로 <가을 레슨>(동천사, 1987), <밤에 쓰는 편지>(신원문화사, 1990), <마지막 비밀까지>(작가정신, 1990), <추억 만나기>(예원문화사, 1991), <어느 때까지이니까>(진흥, 1994), <우이동 시인들>, <혼자 젖는 시간의 팡세>(세기문학, 1998), <소슬비, 채희문 신작 육필시집> (황금마루, 2014), <고목에 꽃 피우기>(황금마루, 2017), <시집 잘 못 간 시집>(황금마루, 2018), <바보새, 채희문 이삭줍기 시집>(황금마루, 2020)등이 있습니다. 역서로는 <문 밖에서>, <쉬쉬푸쉬> 등이 있습니다. 이생진, 홍해리, 임보(강홍기), 채희문 시인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우이동 시인들> 동인이기도 합니다.

희문 시인의 시를 감상하기에 앞서 작년 이맘 때 쯤 소개했던 적이 있는 임보(본명 강홍기) 시인의 시 하나를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네 마리의 소

                             - 임보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蔡熙汶은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들소
나 임보林步는 조그만 염소

이동 시인들‘이라고 이름 붙혀진 동인에 속해 있는 네 명의 시인을 임보 시인이 소개하는 4행(四行)의 짧은 시인데 시인 개개인을 잘 묘사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시 속에 등장하는 네 명을 임보 시인이 직접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은 섬에 미처 늘 물을 떠나지 못한 것이 마치 물소와 같다. 포우는 이중섭의 그림 속에 나온 황소처럼 강렬해 보이지만 사실 양순하고, 난정은 난과 매화를 즐기는 선비지만 들소와 같은 정력이 없지 않다. 나 임보는 굳이 소라고 친다면 보잘것 없는 염소라고나 할까. 이 분들의 아호는 내가 붙인 것이다."

보 시인의 표현처럼 채희문 시인은 이름만 들으면 여자 시인으로 착각하거나 아니면 곱상하게 생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지만, 외모는 건장한 황소를 연상할 수 있을 정도로 우람합니다. 그러나 채희문 시인은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주로 인간의 고독과 죽음, 그리고 이 시대의 불안한 상황 인식에서 출발한 자아의 깊은 고뇌와 한을 현장감 있는 말과 구도적(求道的)인 소박한 언어로 독자와 교감, 공감을 확대하는 글을 탁월하게 잘 쓰는 감성 넘치는 시인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요즘과 같이 ‘12월 본격적인 겨울’이 되기 전인 늦가을 만추(晩秋)의 계절에 가장 많이 읽히는 시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지난 2002년 2월에 문을 연 전남 장흥 천관산 입구의 문학공원에 세워진 시비에 채희문 시인의 '가을레슨'이 돌에 새겨지면서 시 전체를 다 쓰지 않고 앞 부분만 새겨 놓은 탓에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SNS에서 가끔 이 시가 짧게 소개되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한 번쯤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 볼 줄도 알아야 된다는 말로 운을 뗀 시인은 좀 돌아설 줄도 알아야 하고, 또 좀 천천히 갈 줄도 알아야 하며, 또 떨어지는 잎 다시 볼 줄도 알아야 하고 싸늘한 바람 맞고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다시 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운률에 맞춰 노래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좀 멀리 볼 줄도 알 뿐 아니라 좀 가까이 볼 줄도 알고, 또 깊은 것과 얕은 것을 동시에 함께 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나지막이 속삭입니다. 그리고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썰렁한 가슴 젖어 볼 줄 도 알아야 한다고 한껏 가을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난 한 주간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수요일, 시인의 말처럼 어디론가 떠나 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에 공감하여 오래 전부터 계획된 제주도로 출발하는 날, ‘기숙사 학생 중에 한 명이 확진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습니다. 부랴부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곧바로 학교로 복귀하여 후속 조치들을 해 나가는 시간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지요. 확진자의 동선(動線)을 따라 접촉이 의심스러운 학생들이 줄줄이 선별 진료소를 갔다 오고,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격리 공간으로 배치하고 통제하는 일, 그리고 또 다른 의심 증상이 생긴 학생들의 신고를 받고 선별 진료소로 재차 보내는 일 등이 빠르게 진행되는 동안, 책임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과도한 불안과 공포로 인해서 모두 우왕좌왕할 때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분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불행 중 다행스런 것은 한 명의 확진자로 인해서 검사를 받은 관련 학생이 무려 76명이나 되었지만 한 명도 추가 확진 없이 모두 ‘음성’으로 판정되었습니다. 확진자 한 명 때문에 이 가을에 삶의 레슨을 제대로 받은 셈입니다.

을은 참 묘한 계절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또 다시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반추하게 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일간 신문사 기자로 젊음을 붙태웠지만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은 걸음이 쉽지 않고 또 발음도 시원치 않은 시인이지만 젊은 시절에 쓴 그의 시를 통해서 전해주는 울림이 크게 다가옵니다.

생의 가을이 가기 전에 시인이 노래한대로 한 번 쯤은 점점 작아지는 자신을 새삼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이름 지워진 당황스럽고 공포스런 존재가 우리 삶을 휘두르기 전에 가능하다면 싸늘한 바람에 손만 흔들고 서 있는 나무들도, 다시 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 쯤은 말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