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입춘 - 김선우 / 조병화

석전碩田,제임스 2021. 2. 3. 06:49

입춘

- 김선우

아이를 갖고 싶어
새로이 숨쉬는 법을 배워가는
바다풀 같은 어린 생명을 위해
숨을 나누어갖는
둥근배를 갖고 싶어

내 몸속에 자라는 또 한 생명을 위해
밥과 국물을 나누어 먹고
넘치지 않을 만큼 쉬며
말을 나누고
말로 다 못하면 몸으로 나누면서

속살 하얀 자갈들
두런두런 몸 부대끼며 자라는 마을 입구
우물 속 어룽지는 별빛을 모아
치마폭에 감싸안는 태몽의 한낮이면

먼 들판 지천으로 퍼지는
애기똥풀 냄새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작과비평사. 2000)

* 감상 : 김선우 시인, 소설가.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습니다.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물 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 2012), <녹턴>(문학과지성, 2016), <아무것도 안 하는 날>(단비, 2018)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설 <바리공주>(열림원, 2003), <나는 춤이다>(실천문학사, 2008) 등이 있습니다. 2004년 <현대문학상>, 2007년 <천상병시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기상으로 입춘(立春)이라고 하지만 소한과 대한 바로 다음에 오는 절기이다 보니 엄동설한에 자리하고 있어, ‘봄의 시작’이라는 뜻의 말처럼 봄을 느끼기엔 추위가 너무 매섭습니다.

래 전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북한산에 올랐던 때가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토요일이면 산을 오르면서 그럴싸한 산행팀 하나가 꾸려져 ‘토요산행팀’이라는 이름도 하나 지었지요. 본의 아니게 이 ‘토요산행’을 이끄는 산행 리더 역할까지 했으니 얼마나 열심이었던지요. 제 기억에 거의 10년은 넘게 산을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북한산을 오르는 것이 싫증이 날 때 쯤, 가끔은 서울을 벗어나 소위 이름난 유명한 산을 찾기도 하다가 결국 겁 없이 중국의 황산과 백두산에도 도전해서 다녀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어설프지만 산을 사랑하고 또 자연을 느낄 수 있었던 산행가로서 배웠던 한 가지가 있습니다. 겨울 산을 걷다보면 엄동설한 눈이 쌓여 있지만 산행 길 옆에 서 있는 나무와 흙을 통해서 절기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생의 자연은 겉으로 느껴지는 기온이나 날씨에 흔들리지 않고, 정확한 절기의 시간을 알고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알게 된 것입니다. 희한하리만치 입춘이 지나면, 땅에서 느껴지는 봄의 기운이 전달되어 옵니다. 불과 한 주 전까지만 해도 녹지 않을 것 같은 계곡에 얼어 붙은 육중한 얼음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도 들리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산행을 하면서 바로 이맘 때 쯤 가장 많이 동료들과 사용했던 말이, ‘절기는 못 속여!’라는 말이었습니다.

늘이 바로 그 날, '입춘'입니다. 아마도 땅과 나무들은 이미 절기의 시간을 알고 봄의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나요?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추운 겨울일 뿐이라고 느끼시나요?

늘 감상하는 김선우 시인의 시는 제목을 살짝 가리고 그냥 읽으면 아기 갖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 여인이 자신의 뱃 속에 생명체인 아기를 드디어 잉태하고 그것을 묘사하는 시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곧 태어날 아기를 상상하면서 태몽이라도 꾼 후에 그 느낌을 노래한 시인데 왜 하필 이 시에 ‘입춘’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대지의 여신인 자연과 생명의 근원인 여성의 이미지를 대비시켜, 시인은 약동하는 봄의 이미지를 연상해 낸 것입니다. 매서운 엄동설한 한 겨울인데도 시인은 입춘에 ‘먼 들판에 지천으로 퍼지는/ 애기똥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봄 날의 화창함 속에서 잉태하고 있는 땅의 기운을 느끼면서 어린 생명을 위해서 태교의 조심스런 숨쉬기부터 미리 배우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떠 올린 것입니다.

선우 시인은 몸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시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봄의 기운을 눈치 챌 수 있는 입춘을 맞아 그 생명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고 이런 시를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춘’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김선우 시인처럼 온 몸으로 생명이 꿈틀거리는 기운을 느끼고 노래한 시가 있어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입춘

- 조병화

아직은 얼어 있으리, 한
나뭇가지, 가지에서
살결을 찢으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싹들
아, 이걸 생명이라고 하던가

입춘은 그렇게 내게로 다가오며
까닭 모르는 그리움이
온 몸에 쑤신다

이걸 어찌하리
어머님, 저에겐 이제 봄이 와도
봄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봄 냄새 나는 눈이 내려도.

- 시집 <어머니>(중앙출판사, 19730

병화 시인의 시입니다. 그도 입춘 날 눈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온 몸이 쑤시도록 봄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느낀 봄의 기운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찾아오는 똑같은 증상으로 다가왔다고 노래하고 있으니 김선우 시인의 그것과 어쩌면 비슷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하기야 시인 스스로 절기를 알아차리는 땅이 되어 ‘찌르르/가슴에 젖이 돈다’고 노래한 시(서대선 시인)도 있습니다. 그저 절기는 절대로 속일 수 없다는 정도의 평범한 표현으로 만족하는 우리네 범인(凡人)들과는 달리, 자연으로부터 느껴오는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 느낀 후 그것을 시로 풀어내는 시인들이 있어 행복할 따름입니다.

직은 매서운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이미 마당 한 켠에는 상사화 싹이 파랗게 얼굴을 내민 지 오래고, 목련나무 가지에는 꽃망울이 통통하게 새봄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시나브로 봄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일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마음과 몸을 움츠리게 만들지만, 기지개 활짝 키며 화창한 새 봄을 온 몸으로 맞을 수 있길 꿈 꿔 봅니다, 입춘 날 아침에.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