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벗에게 부탁함 / 다시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석전碩田,제임스 2020. 3. 4. 06:40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작과비평, 1999)

 

* 감상 : 정호승 시인

 

1950 1 3,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구 삼덕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계성중학교 1학년 때인 1962년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도시 변두리 지역에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륜고등학교 재학 중, 전국고등학생 문예현상 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당선, 1968년 문예장학금을 지급하는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입학, 동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1973<대한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첨성대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소설가로도 등단하였습니다.

 

집으로는 <슬픔이 기쁨에게>(창작과비평사, 1979), <서울의 예수>(민음사, 1982), <새벽편지>(민음사, 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흔들리지 않는 갈대>(미래사, 1991),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내가 사랑한 사람>(열림원, 2003), <이짧은 시간동안>(창비, 2004), <포옹>(창비, 2007), <밥값>(창비, 2010), <여행>(창비, 2013), <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개정판, 2014), <수선화에게>(비채, 2015),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2017), <당신을 찾아서>(창비, 2020) 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있습니다. 1989년 소월시문학상, 2000년 정지용 문학상, 2006년 한국 가톨릭문학상, 2009년 지리산 문학상, 2011년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호승 시인의 시는 일상의 쉬운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시이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합니다. 개인의 서정을 간결한 시 언어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로 담아내는 탁월한 시인의 능력 때문에 그는 소월과 미당 이후 가장 대중적 지지를 받은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는 가수 양희은 이나 안치환, 이동원 등에 의해 노랫말에 곡조가 붙여져 유행가로도 불려졌기 때문에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현대 시인 중에서는 정호승의 시가 노래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느 가난한 대학생의 결혼식 축가로 불러주기 위해 안치환이 정호승의 시에 곡을 붙인 <우리가 어느 별에서>(1993)는 시와 노래가 만난 아름다운 예가 될 것입니다. 이후, 2008년에 안치환은 자신의 9.5집 음반에 정호승의 시 15편을 노래로 불러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달 전, 그의 열세 번 째 시집, <당신을 찾아서>가 출판되었는데, 그 시집에 그의 시를 소개하는 글을 일부 소개해 봅니다.

 

[언제나 부드러운 언어의 무늬와 심미적인 상상력 속에서 생성되고 펼쳐지는 그의 시는 슬픔을 노래할 때도 탁하거나 컬컬하지 않다. 오히려 체온으로 그 슬픔을 감싸 안는다. 오랜 시간동안 바래지 않은 온기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그의 따스한 언어에는 사랑, 외로움, 그리움, 슬픔의 감정이 가득 차 있다. 언뜻 감상적인 대중 시집과 차별성이 없어 보이지만, 정호승 시인은 슬픔을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으로 승인하고, 그 운명을 사랑으로 위안하고 견디며 그 안에서 희망을 일구어내는 시편 속에서 자신만의 색을 구축하였다.]

    

늘 감상하는 시는, 정호승 시인답게 평범한 시적 은유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발상으로 멋진 시를 만들어 낸 경우입니다. 욕을 얻어 먹고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을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는 경우,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에게 욕을 듣는 상황을 역발상으로 소환해 내 그것을 칙칙하고 암울했던 추운 긴 겨울을 벗어나 새 봄을 기다리는 마음과 잘 엮어서 시적 은유로 삼은 것입니다.

    

나 긴 추운 겨울을 벗어 날 수만 있다면, 아니 새 봄의 전령사라고 할 수 있는 봄비, ‘나무만발하는 진달래이 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욕을 기꺼이 들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새 봄을 기다리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 봄 비 같은 놈!’이라는 욕을 듣고 싶은 마음, ‘! 새 같은 놈!’이란 욕을 듣고 싶은 마음은 곧 새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봄이 저만치 올 것 같지만 아직도 추운 계절에 가끔씩 잎보다 먼저 피어나서 새 봄을 알리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단지 새 봄을 기다리는 것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소원하고 마음으로 멀어졌던, 그래서 그동안 욕을 하면서 지내왔던 벗들에게 이제는 새봄이 되면 사랑과 배려, 그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서고 싶다는 마음까지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상 입춘도 지나고 곁에 봄은 왔으되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여 마음에는 아직 봄이 온 것 같지가 않은 요즈음입니다. 곳곳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왔다는 흉흉한 소식만 들리고, 그 발생한 곳의 거리도 점점 좁혀져 오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오래 전, 시인 동방규가 흉노 땅에서 느꼈을 왕소군의 비참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노래했다는 시, ‘소군원(昭君怨)’이 라는 시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이 시에 나오는 표현,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이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요즈음입니다.

 

새 없이 봄비는 내리고 있지만, 그리고 뜰에는 파란 새싹이 이미 불쑥 올라와 웃자라고 있고 목련 꽃 망울도 금방이라도 벙글어질 듯 차 올랐지만 마음은 왜 이리도 추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땐 첫 번째 시의 제목을 그대로 살린,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다른 시 하나를 더 감상해보면 좋을 듯 합니다.

 

다시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소가 가죽을 남겨 쇠가죽 구두를 만들 듯

내가 죽으면 내 가죽으로 구두 한 켤레 만들어

어느 가난한 아버지가 평생 걸어가고 싶었으나

두려워 갈 수 없었던 길을 걸어가게 해다오

 

벗이여

내 가죽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으로 가죽소파 하나 만들어

저녁마다 독거노인이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다가 울다가 웃다가 잠들게 해다오

 

그리하여 벗이여

내게 아직도 부드럽고 따뜻한 가죽이 남아 있다면

가죽장갑도 한 켤레 만들어

외로운 골목

추워 떠는 노숙의 손들이 낄 수 있는 장갑이 되게 하고

그러고도 내게 아직 가죽이 남아 있다면

별빛을 조금 섞어

써도 써도 만원짜리 지폐 몇장은 늘 들어있는

가죽지갑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마다 빛나게 해다오

 

- 시집 <포옹>(창비, 2007)

 

봄에는 먼 데 있던 벗이 나에게 이 꽃 같은 놈아!’라고 욕이라도 실컷 좀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내가 이 봄비 같은 놈아, 고맙다라고 화답하면서 그동안 굳게 닫혔던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어 젖혔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순서가 바뀌어, 내가 먼저 그렇게 욕을 하며 다시 벗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벗이여!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