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폭설 / 마늘 - 오탁번

석전碩田,제임스 2020. 2. 19. 06:43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시집 <손님>(황금알, 2016)

 

* 감상 : 오탁번 시인. 19437월 충북 제천시 백운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수도여자사범대학(현재의 세종대학교)을 거쳐 1978년부터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난 20088월 정년퇴임, 지금은 명예교수입니다. 1966년 고대신문사 학생기자로 활동하던 스물 네 살 때 동아일보에 철이와 아버지라는 제목의 동화가, 그리고 1967년 이듬해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순은이 빛 나는 이 아침이라는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1987년 한국문학 작가상, 1994년 동서문학상, 1997년 정지용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1985), <생각나지 않는 꿈>(1991), <겨울강>(1994), <1미터 사랑>(1999), <벙어리장갑>, <손님>, <시집보내다>(문학수첩, 2014) 등이 있고, 소설 <처형의 땅>(1974), 산문집 <오탁번 시화>(1998) 등이 있습니다.

 

탁번 시인은 해학과 풍자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익살과 만담을 시의 소재로 끌어들여 질펀하게 녹여내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시인이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오탁번 시인은 우아하고 고상한 언어를 찾아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친숙한 사투리와 계층에 맞는 세속적인 언어를 찾아 대중들의 삶을 이해하고 대변하면서 독자들과 자연스런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탁월합니다. 수많은 애환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시인은 웃음과 해학으로 표현해 내면서 민중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입가에 미소가 맴돌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시인이라고 표현하면 적합할 것 같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이번 겨울, 눈이 펑펑 쏟아지면 함께 나누려고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지만 통 눈이 내리지 않아 그동안 한 쪽으로 살짝 미뤄놓았던 시입니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부터 뒤늦게 내리기 시작한 눈이 서울은 물론, 남도 땅 끝 지방에는 폭설이 되어 내렸으니 이제는 함께 감상하기에 딱 맞는 듯 하여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시는 오리지널 전라도 사투리 버전으로 낭송한 시를 들으면서 감상한다면 더욱 제대로 된 시의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라도 사투리에서 자주 등장하는 욕 같으면서도 욕이 아닌 단어가 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에서 세 번씩이나 등장하는 이 단어의 쓰임새는 욕이라기 보다는 강조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째 연 마지막에 등장하는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는 영어 문법의 형용사 비교급으로 설명하자면 원급에 해당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둘째 연 마지막에 나오는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는 처음보다는 더 강조하는 느낌이 있는 비교급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이장이 거의 울부짖으면서 외치는 외마디,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은 일종의 최상급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같은 이라도 표현하는 억양과 함께 쓰이는 다른 단어들의 조합에 따라서 그 급()이 정해지는 전라도 사투리를 멋지게 버무려서 맛있는 한 편의 시를 써 낸 것이지요.

 

탁번 시인이 특유의 천진함과 자유, 그리고 유머가 넘쳐나는 시를 쓰는 데에는 그의 시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나 문학 작품으로 현실을 다룰 때는 그 현실조차도 문학의 일부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문학의 위쪽이거나 혹은 아래쪽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1980년대 민중시가 유행할 때도 대학에서 그는 서정주 시론을 강의했고 제자들에게는 '통영' '고향'의 시인 백석을 연구시키기도 했습니다. 서정시를 가르치면 비겁자로 몰리기도 했던 시대여서 한 때 학생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걸레처럼 살면서/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풀 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중에서)는 자세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2003,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모교 백운초등학교 애련 분교의 건물과 부지를 사들여 [원서문학관 : 원서헌(遠西軒)]이라는 간판을 내 걸고 귀촌하였습니다. 원서문학관은 누구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와서 둘러보고 글을 쓸 수 있는 곳입니다. 각지에서 온 시인들이 자원봉사자가 되어 매년 여름방학에 지역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무료 어린이 시인학교를 열기도 했고, '원서문학관 시 축제'를 열어 야생화와 농부, 모국어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기도 하면서 즐거운 귀촌 생활을 훌륭히 해 내고 있습니다. 귀향한 시인이 이웃 농부들로부터 흙을 일구고 비료 쓰는 법 등을 귀동냥해 가며 텃밭을 가꾸면서, 농사가 주는 기쁨은 수확이 다가 아님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말처럼 자연과 어울리며 깨닫는 신비로움이 크고, 그것은 곧 시가 되었습니다.

    

쯤에서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귀향을 결심하는 마음과 또 살아 온 인생을 자아 반성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시 하나를 더 감상하면서 글을 맺으려 합니다.

 

마늘 

 

                           - 오탁번

 

마늘밭 씨마늘처럼 왕겨 덮고

춥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온 나는

소쩍새 울음처럼 마늘쫑도 싱그러운

잘 생긴 육쪽 마늘이 된 줄 알았다

참숯마냥 빛나던 머리칼

어느새 다 없어진 오늘,

아뿔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퍼마켓에서 파는

표백제 바른 깐 마늘이 되었음을

나는 이제 알겠다

눈물 날 만치 매운 마늘 맛 다 잃고

염치없이 이 나이를 살았고나

곡필과 아세 남의 일 아니고

성희롱 강 건너 불 아니었다

자살을 꿈꾸며 살았던

젊은 시절의 자화상에

스스로 개칠하면서 살아온

부끄러운 나의 생애,    

기계충 앓는 밤송이머리 큰 눈망울로

창호지문 금간 쪽유리에

**** 모양으로 종이 오려 붙여

빠끔히 내다보던

천등산 아래 옛 마을로

이제 돌아가야겠다

잘못 살아온 생애 이쯤 반납하고

돼지똥 거름 냄새 이냥 풍기는

겨울 마늘밭의 추운 씨마늘로

이제 돌아가야겠다

 

- <현대시>(20072월호)

 

밭에 심은 채소로 고기를 구워먹으며 정겨운 손님들과 두레반(둘러앉는 밥상) 밥 냄새를 풍기며 살아가는 느린 삶을 즐기는 노 시인의 여생이 참 부러울 따름입니다. 해 지는 먼 서쪽, 즉 원서(遠西)에 들었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아오는 곳으로 꾸미는 일을 하면서 창조적인 노년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 석전(碩田)

  

* 註 : 폭설 낭송시 보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셔요

https://www.youtube.com/watch?v=Jo0HxBREYjU&feature=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