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생각
- 김태형
필경에는 하고 넘어가야 하는 얘기가 있다
무거운 안개구름이 밀려들어
귀밑머리에 젖어도
한번은 꼭 해야만 되는 얘기가 있다
잠든 나귀 곁에 앉아서
나귀의 귀를 닮은 나뭇잎으로
밤바람을 깨워서라도
그래서라도 꼭은 하고 싶은 그런 얘기가 있다
- 시집 <코끼리 주파수>(창비, 2011)
* 감상 : 김태형 시인.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92년 〈현대시세계〉 신인공모에 ‘히말라야시다에게 쓰다’외 6편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민음사, 1995),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문학동네), 〈코끼리 주파수〉(창비, 2011), <고백이라는 장르>(장롱,2015)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이름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마음의 숲), <아름다움에 병든 자>(마음산책), <하루 맑음>(청색종이) 등이 있습니다.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 그리고 <청색종이> 출판사 및 서점의 대표입니다.
몇 년 전 김태형 시인은 자신이 중학생 때부터 모은 1 천여 권의 시집으로 문래동 쯤에서 서점 하나를 열었습니다. 출판사도 겸하는 서점의 이름은 “청색종이”. 이곳에서 그는 매주 수요일 시회(詩會)를 열고 있습니다.
그는 20대 초반, 등단과 함께 첫 시집 <로큰롤 헤븐>을 냈습니다. 그 때부터 인간의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파고드는 인간 내면의 고독으로 무장하고 외롭게 시인의 길을 달려 온 그를 어느 동료 시인은 ‘외로움의 시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김태형 시인은 삶의 구체적인 경험에서보다는 삶에 대한 깊은 관념적 사유에서 길어올려 진 시어를 가지고 특유의 청순한 젊은 감각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의 시를 감상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깊은 내면으로부터 오는 큰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의 제목은 <코끼리 주파수>인데, 시인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코끼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무리를 찾거나 짝을 찾기 위해서 신호를 보냅니다. 그게 초저음파인데요.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 낮게 땅을 타고 울리는 그런 떨림이겠지요. 그래야 더욱 멀리 그 신호는 울려퍼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떻게 당신이 있는 먼 곳까지 제 못다 한 말을 전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그의 시들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간결하고 짧지만 이 시를 읽고 나면 깊은 울림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꼭 시인이 해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말하진 않았지만 그 말이 무엇인지는 시를 읽는 독자가 먼저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여백이 있는 시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당신이 있는 먼 곳까지 못다 한 말을 전할 수 있을지 애타하는 마음이 전해지는 시입니다. 제목을 ‘당신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너무도 막연할 것 같아, 시인은 친절하게 제목을 ‘당신 생각’이라고 붙였습니다.
7 년 전, 갑작스런 대상포진으로 안면이 마비되고 구안와사가 와서 나 스스로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모습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심각할 정도로 급성 우울증도 왔던 것 같습니다. 나의 이런 애처로운 겉모습을 보고 너무도 안쓰러워 격려와 위로하는 말이라고 건네는 주변의 절친들에게 스스로 '절교 선언'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몸이 성한 주변의 모든 세상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몸으로 말해 주는 조언이나 말들은 모두 ‘교만한 사람의 말’로 들렸으니 당시 제 상태가 얼마나 뒤틀려 있었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혼자만의 골방에 갇혀 한없이 높은 마음의 ‘성(城)’을 쌓고 힘들어 하며 스스로 ‘절교 선언’을 하고 나니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몰랐습니다. 바로 그 때 문득 유행가 하나가 다가와서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부활의 멤버 정동하가 부른 ‘생각이 나’라는 제목의 노래인데, 그 이후 나의 핸드폰 컬러링으로 사용할 정도로 틈나는 대로 들으며 위로를 받았던 가삿말이 그것이었습니다. 절교 선언은 했지만, 그들이 그리워지고 꿈에서라도 보고 싶을 것 같은 절절한 외로움을 어찌도 잘 표현한 노래였던지요.
//항상 난 생각이나 너에게 기대었던 게/ 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고 있었고/그땐 난 몰랐지만 넌 홀로 힘겨워하던/ 그 모습이 자꾸 생각이나// 아주 오랜 후에야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나를 안고 있지만 너도 힘겨워했지/ 항상 나에게 웃으며 넌 다가왔지만/ 나에게 항상 넌 기대고 싶었음을// 꿈 속에선 보이나봐 꿈이니까 만나나봐/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 꿈 속에만 있는가봐// 힘겨워했었던 날이 시간이 흘러간 후엔/ 아름다운 너로 꿈 속에선 보이나봐/아주 오랜 후에야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나를 안고 있지만 너도 힘겨워했지//
그런데, 김태형의 ‘당신 생각’이라는 이 시를 읽으면서 뜬금없이 바로 이 노래 가사가 오버랩되어 생각이 나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밤 바람을 깨워서라도, 말 못하는 잠든 나귀 곁에 앉아서 가만히 마음과 마음만으로 당신을 생각하고 싶다는 시어들과 '너무 그리워 꿈 속에만 있는가 봐'라고 절규하는 노래 가삿말이 동일한 마음으로 통해서이지 않을까요. 무거운 안개구름처럼,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숱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야 하는 이 세상을 생각하면 더욱 외로움을 느끼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쯤에서 그의 다른 시 하나를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식당 안에서 시종 떠들어대며 늙어가는 사람들의 먹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엿 볼 수 있는 시입니다. 그리고 그가 깊은 시적 사유 끝에 길어 올린 시어들이 얼마나 뛰어난 지를 볼 수 있는 시 입니다.
외로운 식당
- 김태형
초행이라 길 찾기 바쁜데도
길가 음식점 간판에 눈길이 머뭅니다
뭐 좀 새로운 게 없을까 싶어 찾아든 식당
빈자리 하나 잡기도 쉽지 않군요
그 틈새에 겨우 끼어
돌솥밥 한상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손님들 뒤쪽으로
기러기탕 백숙 육회
이 집 특별식 메뉴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습니다
식용으로 사육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기러기라니
멀건 하늘처럼 끓고 있는 탕 속에서
보글보글 날고 있는 기러기들
먼 길 떠나는 날갯짓 소리는
사람들 시종 떠들어내는
온갖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습니다
저 늙어가는 사람들이 차라리
어디 가서 조용히 불륜이라도 저질렀으면 하고
측은해집니다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기러기 한 마리씩 뜯어먹는 대신
뭔가 그리워하는 얼굴로
안타까워하는 모습들로 앉아 있으면 안되나
아까 올려다본 흐린 하늘의 기러기떼가 아니었으면
내가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을 뻔했습니다
- 시집 <코끼리 주파수>(창비, 2011)
무슨 말을 해도, 아무 비판없이 그리고 아무 판단없이 그저 내 편이 되어 주는 외로움을 아는, ‘당신’이 참 그립습니다. - 석전(碩田)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월 / 겨울노래 - 오세영 (0) | 2020.02.26 |
---|---|
폭설 / 마늘 - 오탁번 (0) | 2020.02.19 |
시의 경제학 - 정다혜 (0) | 2020.02.05 |
겨울나무 - 이재무 (0) | 2020.01.29 |
걸림돌 - 공광규 / 사랑한다 - 정호승 (0) | 2020.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