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시의 경제학 - 정다혜

석전碩田,제임스 2020. 2. 5. 06:40

시의 경제학

 

 - 정다혜

 

시 한 편 순산하려고 온몸 비틀다가

깜박 잊어 삶던 빨래를 까맣게 태워버렸네요

남편의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을

내 시 한 편과 바꿔버렸네요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으로 문학상을 받고

어떤 시인은 꽤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는데

나는 시 써서 벌기는커녕

어림잡아 오만 원 이상을 날려버렸네요

태워버린 것은 빨래뿐만이 아니라

빨래 삶는 대야까지 새까맣게 태워 버려

그걸 닦을 생각에 머릿속이 더 새까맣게 타네요

원고료는 잡지구독으로 대체되는

시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경제는 언제나 마이너스

오늘은 빨래를 태워버렸지만

다음엔 무얼 태워버릴지

속은 속대로 타는데요

혹시 이 시 수록해주고 원고료 대신

남편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 보내줄

착한 사마리언 어디 없나요

 

- 시집 <마지막 출근>(문학의전당, 2014)

 

* 감상 : 정다혜. 1955년 대전에서 태어나 2005문학의 전당 시인선‘ <열린시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했습니다. 시집으로 <그 길 위에 네가 있었다>, <스피노자의 안경>, <마지막 출근> 등이 있습니다. 현재 독서 논술지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를 읽고 그 감상문을 블로그에 쓴 지도 벌써 햇수로 3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정기적으로 쓰다가 본격적으로 매 주 한 편씩 감상문과 더불어 소개한 것도 2 년 정도 지난 듯 합니다. 그동안 읽었던 시편들이 150편이 넘었으니, 구약 성경의 시편 150편과 얼추 그 량에서는 비슷해졌습니다.

 

가 시를 처음 접했던 것은 대학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려 있던 문덕수 시인이 쓴 시에 관한 긴 평론 글이 당시에는 예비고사에서 최고 출제 빈도를 자랑했기 때문에, 수험생들은 그 본문을 밑줄 쫘악 그어가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했더니 그 분이 바로 [문장강화(文章講話)]라는 국어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교과서를 통해서 알았던 사람을 직접 만나고 또 강의도 들을 수 있었으니 당연히 시에 대해서 호기심도 생기고 또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요. 그러던 중 1년에 한 번씩 시, 소설, 사진, 평론 등의 학생 작품을 공모하여 당선작을 내는 교내 <학예술상 행사>에 같은 반 친구가 응모했다가 최우수작으로 당선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내성적이었던 그 친구는 대학신문사 학생 기자로 활동하는 나에게 자신이 쓴 시 몇 편을 행사 주최 기관이었던 대학 신문사에 대신 제출해 주길 부탁했었는데 바로 그 시가 당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에 대해서는 그저 호기심만 있고 전혀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 시를 건네기 전 봉투에서 꺼내 잠시 읽어보았습니다. 온통 알 수 없는 시어들의 배열이었습니다. 솔직히 마음속으로 이게 무슨 시야. 대신 전달해 달라고 하니 전달은 하겠지만...’하는 마음으로 작품 접수를 시켰습니다. ‘얘야, 좀 울어보거라라는 제목의 그 시는 그 때만해도 제게는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알 수 없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 후 심사가 끝나고 학예술상 수상자들이 발표되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로 친구의 시가 최우수 당선작이 된 것입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친구를 만나 기쁜 소식을 먼저 전해 주면서 도대체 그 시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저의 초등학생 수준의 질문에 친구는 친절하게 이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 어느 날 아침 신문을 읽는데, 용돈을 적게 준다고 자기를 키워 준 할머니를 죽인 패륜아 기사를 보고 너무 안타깝고 분해서 그 시를 써 봤어

    

말을 듣고 최우수 당선작 시를 다시 읽는데, 금방 친구가 말했던 그 감정이 어쩌면 그리도 고스란히 전해지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경험이 나에게는 , 시라는게 바로 이런거구나.’하는 첫 만남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에 대해서 경외심에 가까운 막연한 짝사랑을 했던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 틈만 나면 시를 틈틈이 공부했던 시작점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늘 감상하는 정다혜 시인의 시는 그저 시를 좋아하는 나와 같은 수준을 넘어, 나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로 작정하고 시 전문지 등을 통해서 소위 등단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수준의 시인들이 어떤 일상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지를 진솔하게 보여주는 시입니다. 자나 깨나 좋은 시를 하나 써 보겠다는 생각으로 하루 종일 '순산하듯이' 골몰하는 모습이 그려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나 지금이나 시업(詩業)으로 생활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른 직업이 있든지, 아니면 유명세를 타서 시집이 불티나게 팔리는 로또같은 대박을 터뜨리지 않는 이상 배고픈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시의 제목처럼, ‘시의 경제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닌 마이너스입니다. ‘원고료 대신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웃지 못할 연민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시 속에는 시 원고료를 두둑이 받는 사람도 들었다고 표현했지만 원고료는 커녕 힘들여 쓴 시를 읽고 잘 읽었다한 마디만이라도 해 주면 그것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는 게 시인의 마음입니다.

 

, 문학사상사에서 주최하는 <이상문학상> 2019년 대상 수상자가 수상을 거부하는 사태로 일파만파 문단에서 일어나는 일명 작가들의 반란 소식이 요란합니다. ‘문단의 경제학이 깨지는 균열음이 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문단에서는 대형 출판사가 그럴 듯한 문학상을 제정하여 작가에게 상을 주고는 그 작가의 작품 저작권을 출판사에서 슬쩍 가져가는 방식으로 계약을 했나 봅니다. 그리고 상금조차도 한 푼 주지 않고 그 작품을 실은 책이 출판되어 팔려서 생기는 인세로 주겠다는, 전형적인 갑질 계약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작가는 상을 탔다는 요란한 축하 인사만 받았을 뿐 그로 인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은 전혀 없었던 셈입니다. 아니 경제적인 도움은커녕, 큰 상을 수상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술과 밥을 사야 하니 오히려 손해만 생기는 구조가 바로 문단의 경제학이었던 셈이지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라는 우리 속담이 바로 딱 적용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쪼록 이번에는 이런 악습의 관행이 깨지고 새로운 제도가 정착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런 의미에서 시인의 같은 시집에 수록된 시 한 편을 더 읽고 오늘 감상을 마무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습니다. 속이 새까맣게 탄 시인에게 경제적인 도움은 되지 못하지만, 이렇게 시를 소개하는 참에 시 한 편 더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말입니다. - 석전(碩田)

    

슬픈 빈말

 

- 정다혜

    

새해 첫날, 첫 아침

여든 어머니 화투장으로

한 해 운수 패를 놓는다

아버지 세상 떠나시고

변하지 않는 어머니의 새해 꿈은

 

이월님을 만나

삼월 벚꽃 아래에서나

팔월 둥근 보름달밤에

구월 국화주 한 잔 나누고 싶은 것

그러나 번번이

임에게로 가는 날개 한번 달아

훨훨 날아보지도 못한다

삼월 벚꽃 아래

팔월 보름달 아래

누워보지도 못한다

아버지 좋아하셨던 구월 국화주

올해도 자작하시며

너무 오래 살았어

빨리 죽어야 하는데

그 양반 왜 날 데려가지도 않는지

 

어머니, 새해 꿈으로

화투장 사이 슬쩍슬쩍 끼워 넣는

살아서 슬픈 빈말

 

시집, <마지막 출근>(문학의전당,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