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사라진 서점 / 속초 등대에서 - 고형렬

석전碩田,제임스 2020. 1. 15. 06:38

사라진 서점

 

                                -고형렬

 

드르륵, 조용히 문을 열고

흰눈을 털고 들어서면

따뜻한, 서점이었다

신년 카드 옆엔 작은 난로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높은 천장까지 가득

차 있었다 아 추워, 언 손을

비비면 그 12월임을 알았다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리워

좋은 책 한권 고르다 보면

어디선가 하늘 같은 곳에서

새로운 날이 오는 것 같아,

모든 산야가 겨울잠을 자는

외로운 산골의 한낮

마음만한 서점 한쪽엔

생의 비밀들을 숨긴 책들이

슬픈 책들이, 있었다

다시 드르륵, 문을 열고

단장된 책들이 잘 꽂혀 있는

그 자리에 한참, 서고 싶다

그대에게 소식을 전하고

새로운 마음을 얻으려고

새 눈 오던 12월 그날처럼

 

-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창작과비평사, 2001)  

* 감상 : 고형렬 시인. 1954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으며, 시인의 말을 빌면 소년 시절 스스로 가출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남 할머니 집에 보내졌다가 5학년 때 다시 강원도 고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어린 고형렬은 <장자>를 읽다가 거기 나오는 문자들을 카드에 써서 늘 들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엔, 바닷가에 홀로 서서 유애(有涯)”란 글씨를 한 번 보고 먼 바다를 응시하다가 다시 또 유애를 들여다보곤 했었는데, 돌연 아버지가 나타나 물었다고 합니다. “그건 뭐냐?” 안 보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아버지에게 카드를 보이고 나서, 그는 한동안 부끄러워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고 합니다.

 

초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이렇게 어릴 적부터 접한 장자는 어린 소년의 내면을 탄탄하게 키워냈나 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해 1974, 지방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강원도 고성, 대진 등지에서 8년 동안 어업 담당 면서기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1979<현대문학>'장자' ‘대청봉 수박밭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와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고형렬 시인이 이십 중반이 되던 해였습니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 추천을 받은 시가 장자였다는 사실이 심상치 않습니다. 유년 시절부터 읽었던 장자와의 강렬한 만남, 그리고 첫 직장으로 일했던 곳이 분단 조국의 현실이 몸으로 느껴지는 산하였기 때문일까요. 금강산이 보이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화진포)을 시작으로 군사 분계선이 맞닿아 있는 16개 부락을 직접 발로 걸으면서 그는 튼튼한 사유의 근력(筋力)을 키워 시의 세계에 뛰어든 것입니다.

    

시집 <대청봉 수박밭>(1985) 이후, <해청>(1987), <해가 떠올라 풀이슬을 두드리고>(1988), <서울은 안녕한가>(1991), <사진리 대설>(1993), <바닷가 한 아이에게>(1994), <성에꽃 눈부처>, <김포 운호가든집에서>(2001), <밤 미시령>,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유리체를 통과하다>,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등의 시집과 장시집 <붕새>, <리틀보이>(1995)가 있습니다. 이밖에도 에세이집, 산문집, 자전 에세이, 동시집 등 다양한 책들을 펴냈습니다.

    

후 그는, 2000년 계간 <시평>을 창간하고 13년 동안 900여 편의 아시아 시를 소개하며 시의 지궁한 희망을 공유하는 한편, 뉴욕의 아세안기금을 받아 시의 축제를 열면서 [Becoming](한국)을 주재하고 [Sound of Asia](인니)에 참여하는 등 아시아 시 교류에도 앞장섰습니다. <창작과비평사> 편집부장,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일본의 시바타 산키치, 중국의 린망 시인 등과 한..<몬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오래 전 들리곤 했던 어느 사라진 서점에 대한 추억을 시적 은유로 삼아 현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입니다.

 

12월 겨울, 첫 눈 오는 어느 날 들렀던 서점은 참으로 따스했습니다. 드르륵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선 그 서점에는 천장 가득 책이 쌓여 있었고, 또 따뜻한 난로가 켜져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에는 언 손을 비벼야 했지만 그 서점에는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서 책을 고를 수 있을 정도로 온기 뿐 아니라, 하늘 같은 곳 신비스런 어디선가로부터 내려오는 새 날의 꿈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련한 슬픈 사연이 되었지만 마음만한 서점 한 쪽엔 내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비밀의 책들도 있었던 곳입니다.

    

라진 서점과 함께 사라진 것은 또 있었습니다. ‘그 해 12월의 외로운 시골의 따뜻한 기억과 함께 사라진 것은 어디선가 하늘 같은 곳에서 오곤 했던 새로운 마음입니다. 시인은 그 사라진 새로운 마음을 소환해서 다시 그 자리에 서고 싶다고 노래하며 시를 맺고 있습니다. 새로운 마음이 새 눈 오던 그 해 12월의 그 날처럼 올 것을 간절히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쯤에서, 이 시가 어찌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시인 지 알 수 있는 힌트를 줄만한 다른 시 하나를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그의 시에서 첫 눈이 아니라 새 눈이라고까지 표현하면서 세속에 물든 자신을 돌아보며 처절하게 참회하고 있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속초(束草) 등대에서

 

                                 - 고형렬

    

저 산과 이 바다에서 자라나

네 피는 어디다 다 바치고

이제 돌아와서 우느냐

 

내게 등대만한 밤이 있었느냐

숨어 잠든 파도가 되렴아

북으로 날아가는 새 되렴아

    

산세가 깎아지른 절벽이고

창해는 마음속에 끝이 없는 걸

어디 떠돌다 여기 들렀나

 

눈 부끄러워라 눈 부끄러워라

이 화엄에서 살았던 나

어느 물에 썩어 돌아왔는가

 

- 시집 <바닷가의 한 아이에게>(씨와 날, 1994)

 

구나 마음 속에 따스한 아름다운 추억 하나 쯤 간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나의 모습은 그 하늘같은 곳에서 오곤 했던새로운 날을 꿈 꾸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자리에 서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으면서 그 때 그랬던 것처럼 그리운 그대에게 잃어버렸던 새 마음을 찾았노라 전하고 싶어 하는 시인처럼, 화엄의 썩은 창일한 물을 뒤로 하고 그 해 12월의 그 날처럼 이 자리에 내가 돌아왔노라고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