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고백 - 손계정

석전碩田,제임스 2020. 1. 1. 06:44

고 백

- 영도다리 점집 할머니 가시던 날

 

                                        - 손계정

 

내 죄 마이 짓고 살았다

1.4 후퇴 때 밀려 온 인생이 영도 지끼미가 안됐나

이 낡고 좁은 방구석에 앉았어도

대통령 집무실만큼 큰 일 한 곳인 기라

바람같은 놈들 바람처럼 스쳐가고

물결같은 년들 물결처럼 앵겨들던 사연 많은 곳이제

이 놈 저 년 온갖 불쌍한 잡것들

지들 몫의 행복 누가 뚱쳐가기라고 한 것처럼

찔찔 짜고 흥분하고 털어놓는 사연들이 참말로 형형색색이제

 

아 근디 참 우스븐 일인기라

, 묵고 살라꼬 우짜다보이 장군님,

여러 신장들 모시고 있기는 하지만

그 분들이 머가 답답해서 내같은 거한테 들오시가꼬

생면부지 저거들 인생을 점사해 주겠노

이것저것 물어보로 오는 사람들

다 내처럼 깜깜하고 답답한 사람들 아이겠나

척 들으믄 척 보이는기

한 세상 살다보면 다 보이게 되는 이치 같은거제

그래도 내 성의껏 들어주고 내 새끼들이믄

이래 머리를 터 줘야 안 하겠나

싶은대로 마음을 다 했는기라

 

토닥토닥...

내 암담했던 그 시절의 내한테 해주드끼.....

 

다들 살아낸다꼬 욕본다 아이가

다 지 혼자 기가 찬 것 같제

다들 그런 사연 딛고 또 견디고 넘어가메

우째우째 살아지는거라

 

그런 맴으로 이 자리 지키 왔응께로

너무 나쁜 년이라 하지는 마소

나름대로 그 사람들 살리볼라꼬 최선을 다했는기라

 

욕하지 마소이

 

다 불고나이 인자는 그 분이 오시도

편안하게 따라갈 수 있을 거 같소

 

- 손계정 시인의 애송시 낭송집 CD

 

* 감상 : 손계정. 시인, 화가, 시낭송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2 격월간 <시사사> 송수권 시인 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2003 <시의 나라> 신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시집으로 <그림자의 노래>, <바람의 사모곡>,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솔개>(한국문연,2009) 등이 있습니다. 현재 문화공간 <예모 갤러리>를 운영하며 시낭송과 다양한 시 가극을 연출하는 <시나래> 단장 등 부산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해 2월, 일본 효고현 가와베에 살고 있는 일본인 하마기시 씨가 애타게 사람을 찾는다면서 남포동 주민센터를 찾았습니다.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부산 영도다리가 보이는 계단 옆 점집에서 만났던 정 많았던 할머니였습니다. 직장 일로 가끔 한국에 오면 항상 그는 이곳을 찾았는데, 지난 2013년 부산대교(영도대교)가 새로 들어서고 2015년부터 이곳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점집들이 하나 둘 문을 닫는 바람에 할머니를 만날 수 없어 딸과 함께 점집을 운영했던 할머니를 찾아달라고 주민 센터의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렇듯, 부산의 영도다리 부근 점집을 찾는 이들은 참 많았습니다.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사연을 들어주고 헤어진 가족의 생사를 점치며 한때 50여 곳이 성업했을 정도였지만 하나 둘 사라져 지난 2015년 '소문난 대구점집'의 배남식 할머니와 '장미화점집'의 김순덕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옛 명성은 사라졌습니다. 그 후 배 할머니는 낮에는 점집 앞 노상에서 점을 보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늘 감상하는 이 시는 이런 영도 다리 근처 점집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읽으면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손계정 시인의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재미있는 시라고 지인 한 분이 보내 준 시낭송 유투브 동영상 때문이었습니다. <폭설>이라는 제목의 오탁번 시인의 시였는데, 그 동영상 바로 다음에 이 시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냥 읽으면 밋밋하게 아무 느낌이 없었을 시가, 직접 경상도 사투리의 강약 장단을 맞춰 낭송한 음성을 들으니, 마치 점집 할머니가 바로 옆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듯 다가오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싯점에서 함께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소개해 봅니다.

 

1.4 후퇴 때 피난민으로 영도 다리 근처에 찾아들었다가 반백년을 점집을 운영하면서 그곳을 드나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 준 할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면서 했을 법한 자신의 마음을, 시인은 마치 그녀의 영혼을 덧입고 대신 풀어내고 있는 듯합니다. 무슨 용한 재주가 있어서 이런 일을 한 게 아니라, 그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려고 어쩔 수 없이 점을 쳤다는 것을 이 생을 마감하는 이즈음에 마지막으로 고백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종교, 신앙 운운하면서 21세기 초과학 문명의 시대에 무슨 점이냐고 비판을 하는 혹자들에게는 자기 변명 같은 넋두리를 하는 듯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연을 ‘고백’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하자면, 고달픈 시절을 살아가는 피난민들의 애환을 들어주는 삶의 상담자 역할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토닥 토닥, 그 암담했던 그 시절에는 아무도 할머니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할머니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한 얘기들이었지만, 평생을 울고 불고 형형색색 털어놓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 들어주듯이 들어주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고백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너무 나쁜 년이라 하지는 마소/ 나름대로 그 사람들 살리볼라꼬 최선을 다했는기라/욕하지 마소이’

 

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풀어내는 할머니의 고백 사연을 들으면 아마도 마지막까지 이곳을 떠나지 못해, 재개발에 헐리는 점집을 떠났지만 주변 노상에서 끝까지 점을 쳤던, 대구 점집을 운영했던 배남식 할머니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부문에 초청된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감독 김영조)는 영도다리 밑 점바치 골목의 이야기를 그려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2013년 영도대교의 도개로 주변 가치가 상승하면서 이곳에 살던 낡은 가옥의 세입자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그린 영화였습니다. 흥겨운 인파 속에 쫓겨날 것이 염려돼 초조하게 서 있는 점집 할머니의 표정이 애잔함을 더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를 걸쭉한 경상도 발음으로 낭송하는 음성을 들으면 한 생을 마감하면서 이제는 자신의 삶 전체를 ‘불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 진다는 고백이 진솔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런 망자의 마음을 승화시키는 시인의 관찰력이 너무도 멋집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날 아침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 같지만, 평생 점을 쳐 온 할머니도 결국 답답한 건 매 마찬가지,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정해 진 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모시고 살았다는 장군이나 여러 신장들도, 그녀의 말을 빌면 뭐가 답답해서 인생들에게 일부러 개입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 척 들으면 척 보이는 ‘상식’의 수준으로 가능했던 일들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겪는 격랑과 어려운 일이 자신에게만 생기는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모든 일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자기 삶의 몫과 분량으로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저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딛고 일어나서 끝까지 견디면서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쯤에서 성경 시편의 기자가 새해 아침에 올려드렸을 법한 기도로 오늘 시 감상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시편 90:12~15)

 

2020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석전(碩田)


<고백> 시낭송 동영상 - 이곳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s://youtu.be/3tZFgvl9j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