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 허홍구
급하다고 - 꼭 갚겠다고- 날 못 믿으시냐고-
그래서 가져간 내 돈 2천만 원
자식들에게도 내가 돈이 어딨노 했고
마누라도 모르는 내 쌈짓돈 그 돈 그만 떼이고 말았다
애타게 찾던 그 사람 몇 개월 만에 전화가 왔다
제가 그 돈은 꼭 갚아야 한다며
은행통장 번호를 알려 달란다
자기 식당 말아먹고 남의 집에서
하루 일당 5만원을 받아 어떤 날은 3만원을
또 어떤 날은 2만원을 통장으로 넣어준다
오늘도 그 사람 행방은 모르고 눈물 3만원어치를 받았다
기쁨도 3만원어치 받았다 돈보다 귀한 눈물을 받았다
내게 그 눈물은 행복이다 나도 눈물 3만원어치를 보낸다
ㅡ 시집 <시로 그린 인물화> (북랜드,2012)
* 감상 : 허홍구 시인.
1946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인이자 수필가이면서 현재 <우리말 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와 <행복하게 어울리는 모임>인 ‘광화문 사랑방’의 이끔이로, 또 “가진 힘을 나라위해 바치리라”라는 모임 <가나바>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을 가꾸고 지키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올해 아홉 번째로 낸 시집, <사랑하는 영혼은 행복합니다>의 제목에 ‘시인의 말꽃 묶음'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즉, 그는 시(詩)를 말의 꽃, 즉 ’말꽃‘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을 오랜동안 이끌었던 고 이오덕 아동문학가가 ’나는 시를 말꽃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생전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사용한 것입니다.
시집으로는 <사랑 하나에 지옥하나>(혜화당, 1996), <네 눈으로 나를 본다>(북랜드, 1998), <내 니 마음 다 안다>(솟대, 2001), <사람에 취하여>(시선사, 2009) 인물시집, <그 사람을 읽다>(개미출판사,2010) 인물시집. <시로 그린 인물화>(북랜드, 2012), <잡초>(유월의 나무, 2016) 전자시집, <시로 그린 인물화 나를 물들이다>(북랜드, 2016) 인문시집,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북랜드, 2019)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손을 아니 잡아도 팔이 저려옵니다>(북랜드, 1996), 편저 <회의진행법 강의>(범우사, 1993)가 있습니다.
그의 시집들이 대부분 ‘인물시집’이라는 별칭이 붙은 걸 보면 짐작하겠지만 허홍구 시인하면 인물 평전시를 떠올리게 됩니다. 시인의 특기인 인물 시들은 권녕하 시인을 필두로 김성수 대한성공회 대주교, 박항서 베트남 축구팀 감독, 송월주 스님, 친구 박명칠, 고 변세화 시인, 송종의 전 법제처장, 한승욱 시조시인 등등, 유명 무명 익명을 막론하고 어떠한 차별 없이 ‘그 사람’을 세밀하게 바라보고 기록하고 있는데 시인의 시로 쓴 이 짧은 평전 편편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존경과 애정으로 일관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 평전시를 통해서 뭔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지향점이 뚜렷하다는 것도 특이 할 만합니다. 특히 그의 시는 해학과 풍자가 있고 쉬운 구어체로 시를 쓰기 때문에 시를 읽다보면 어느새 빙그레 웃음이 나오고 말 정도로 재미가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도 이런 평전시(評傳詩) 중의 하나인데,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한 시입니다. 시의 끝에, ‘식당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망한 사람‘이라고 쓴 걸 보면 분명히 허 시인과는 아내나 자식들에게 알리지 않고 돈을 빌려 줄 정도로 잘 알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음이 약해 돈을 빌리러 온 그에게 거절하지 못하고 돈 2천만원을 빌려줬다가 되돌려 받지 못한 속상한 상황을 시로 썼지만, 시를 다 읽고 나면 사깃꾼에게 당했다는 억울한 마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행방을 모르는 ‘그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애정이 넘치는 시입니다.
며칠 전, 친구와 번개 모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역에 걸려 있는 시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버지의 도장’이라는 제목의 주영국 시인의 시였습니다. 빚 보증을 잘못 서서 큰 밭을 날려버린 그 인감 도장을, 폐허가 된 무너진 옛날 집 더미에서 발견하고 느낀 감정을 시로 표현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40 년 전,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와서 조그만 구멍 가게를 하셨던 아버지가 자주 가게에 들리는 젊은 부부에게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만원을 빌려줬다가 받지 못해서 속상해 하고 또 가족들에게 핀잔을 듣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돈이면 당시에는 서민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는 거금이었지요. 가족들 몰래 행방이 끊긴 그 사람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 어디 쯤인가 다녀오신 날, 아버지 혼자서 끙끙거리며 아픈 속을 움켜잡고 속상해 하시던 모습을 목격했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오늘 감상하는 허홍구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그 사람’은 비록 행방은 끊었지만, 한 푼이라도 갚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합니다. 아마도 허홍구 시인의 이 시를 꺼내 읽고 싶었던 계기가 바로 지하철 역에서 읽은 그 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연말이라 송년 모임이 이곳 저곳에서 있는 계절이다 보니 탈도 많고 말도 참 많은 듯 합니다. 특히, 작은 조직이든 큰 조직이든 한 조직을 이끌던 사람이 차기 일꾼에게 업무를 인계하는 과정에서 회계(돈) 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해주지 못해서 생기는 오해와 불미스런 말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깔끔하게 정리해서 통장에 넉넉하게 돈을 남겨서 넘겨주면 별 말이 없을텐데, 그동안의 지출과 수입 내력이 적힌 통장은 온데간데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남은 돈이 생각했던 것만큼 넉넉하지 않으니 ‘뒷 말’이 나돌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늘 주장하는 것은, 동호회나 친목 단체는 회비를 걷어 쌓아두지 말고 행사나 모임 때마다 참석자 머릿수로 나눠 그 날 그 날 깔끔하게 정리해버리는 '1/N 원칙'이 좋다는 것입니다.
허홍구 시인의 같은 시집에 있는 그의 인물시를 읽다가 그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물 평전시를 하나 더 소개해 드리고, 또 그를 흉내내서 그의 친구 권천학 시인이 허홍구 시인을 평한 시도 함께 소개해 봅니다.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문인들의 주고 받는 문학적 재치가 참으로 부럽습니다. - 석전(碩田)
손영일
- 허홍구
내 친구 가운데 영어를 가장 잘하고
가장 늦게 박사 학위를 받고
아직도 술 실력이 변함없고
젊은 날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친구
경남 양산이 고향이고
“가진 것을 나라 위해 바치리라.”고 약속했던
그 옛날 ‘가나바’의 이름으로 뭉친 오랜 친구
주) 한트라의 대표이시다.
우리나라 최초로 창업대학을 개설했고
영국무역상사에서도 근무했고
러시아 모 대학의 교수도 했고
누구를 닮은 손영일이 아니라
손영일다운 손영일을 외치던 친구
오늘도 저 아프리카와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자우편을 보내고 유창한 영어로 통화를 한다.
오래전에 빈손으로 넘어졌다가
세계를 손아귀에 쥘 궁리를 하고 있다.
시인 허홍구를 말하다
- 권천학
비가 쏟아지는 날 천둥번개가 치면
지은 죄업 때문에 문 밖 출입을 삼가 한다는 남자
저놈 잡아라하고 찾아올 여자들 때문에
T.V 에는 절대로 출연을 못한다며 너스레를 떠는 남자
가슴이 펄펄 끓어서 찬물만 마신다하고
속이 달아 설탕을 먹지 않는다 하고
단물만 빨아먹고 뱉는 것이 싫어
껌을 씹지 않는다는 사람
목욕 할 때와 바람피울 때는
전화를 못 받는다며 예고하는 싱거운 사람
바람둥이란 소문이 있는데도
그의 애인이 누구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고
끊임없이 호감을 갖게 하는 중년남자
그는 늘 바람을 일으킨다.
참치 회는 좋아한다면서도
접시위에 꿈틀거리는 활어 회를 보고는
불쌍해서 못 먹겠다는 맘 약한 남자
앞머리가 많이 빠지고 술을 좋아하는 시인
그의 선한 눈빛에
수많은 여자들이 빠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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