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ㅡ,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ㅡ,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시집 <맨발>(창비, 2004)
* 감상 : 문태준 시인.
1970년 경북 김천, 황학산 기슭 봉산면 태화리에서 태어나 김천고,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석사 학위, 그리고 일반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 문학상에 시 '처서(處暑)'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현재는 불교방송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지난 1984년 결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4년 <동서문학상>, 2005년 <미당문학상>, 2006년 <소월시문학상>, 2018년 <목월문학상>, 그리고 올해 5월에는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여 5관왕 수상자가 되었으며 시집으로는 <수런거리는 뒤란>(창비, 2000), <맨발>(창비, 2004),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그늘의 발달>(문학과 지성사, 2008), <먼 곳>(창비, 2012),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 2015),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 등이 있습니다.
문태준 시인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2005년 그가 미당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세간에서 보인 반응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35세였던 그가 제 5회 미당문학상에 선정되었다고 했을 때, 한 평론가는 ‘일대 파란’이라는 표현을 했고, 한 원로 시인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그의 수상 소식은 일대 파란이었고, 또 문단이 술렁이게 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요. 당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정현종 시인은 ‘천상 시인을 하나 만났다’고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가 시로 화려하게 꽃을 피운 것입니다.
2004년에 출간 된 그의 시집 <맨발>에 실린 오늘 감상하는 시는 개조개의 느릿느릿한 행동을 시인의 맑은 눈동자로 한참 바라보고 난 후에 맨 발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성찰하는 서정시입니다.
어물전의 조개든 개펄에 살아가는 조개든, 그저 당연한 그의 발이 '부르튼 맨발’이라는 사실이 시인의 눈에는 새삼 각인이 되었나 봅니다. 말하자면 '맨발'이 하나의 시적 은유가 되어 이 시를 전체적으로 이끌어 가며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개의 발이 ‘부르튼 발’이라고 반복해서 표현하는 것과 ‘슬피 우는 제자’, 가슴에 슬픔을 묻고 견디는‘ ’가난의 냄새가 풍기는 움막‘ 등이 주는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앙하던 부처가 죽은 후 울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서부터, 사랑을 잃고 가슴 아파하는 이의 슬픈 모습, 그리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생의 골목길을 누비는 인생들의 모습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 맨 아래에는 언제나 늘 '맨발'이 있음을 시인은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느릿 느릿한 맨발의 움직임이 지금까지 지내 온 시간의 흐름처럼 아주 천천히 진행되어 왔고 또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도 시인은 정확하게 포착해 냅니다. 이 시를 통해서 시인은, 한 마리 개조개를 면밀히 관찰하면서도 ‘맨 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진짜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소한 자연을 귀하게 여겨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순박한 정서로 시를 쓰는 그를 한국의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적자라고 평가하고 있는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문태준 시인의 시집 <맨발>에 실린 다른 시들도 대부분 옛 풍경과 정겨움이 그대로 묻어 있는 시들입니다. ‘역전이발’, ‘장대비 멎은 소읍’, ‘맷돌’ ‘배꽃 고운 길’ 등의 시를 읽으면 시골 풍경의 서정이 그대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제주도에 갔을 때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추억 박물관을 잠시 들렀습니다. 옛날 추억이 새록새록 나게 하는 옛 물건들을 어쩌면 그렇게도 많이 수집해 놓았는지, 한 바퀴 돌아 나오니 마치 60, 70년대를 잠시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문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문득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의 시집 <가재미>는 지난 10년 간 2만 5천권 이상이 팔려 시집으로는 가장 잘 팔리는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드는 12월을 맞으면서, 이런 향토색 짙은 서정으로 무장한 시인의 시집 한 권 쯤 구입해서 감상하는 여유로움이, 따뜻한 월동을 위한 준비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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