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을동
- 현택훈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말방이집 있던 자리에는 말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어허어야 뒤야로다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 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 물마저 마르려고 하네
저녁밥 안칠 한 바가지 물은 어디에
까마귀만 후렴 없는 선소리를 메기고 날아가네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 제1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
* 감상 : 현택훈.
1974년 제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목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2007년 ‘시와정신’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2005년 정지용문학상 신인상, 2006년 수주문학상, 그리고 2013년에는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 4.3 사건 당시 잃어버린 마을인 제주시 화북1동 곤을동을 소재로 쓴 시가 제1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 <지구 레코드>, <남방 큰돌고래>, <난 아무곳에도 가지 않아요>가 있고,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이 있습니다. 지난 2017년 9월에 개봉되었던 영화 <시인의 사랑> 실제 모델이기도 한 현택훈 시인은 제주에서 태어난 제주 출신 시인 부인(김신숙)과 함께 ‘시의 옷 서점(시.옷.서점)’을 운영하면서 제주도에서 시를 쓰고 있는 토박이 제주 시인입니다.
제주에서 한 편의 시를 보내는 오늘 아침에는 특별히 제주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의 시를 한번 읽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키워드를 ‘제주의 시인’이라고 했더니 꽤 많은 시인들이 검색이 되고, 또 그와 함께 시와 영화가 함께 소개되는 글들이 참 많네요. 그 중에서도 영화 <건축학개론>과 <시인의 사랑>에서 소개되는 제주의 풍광들과 이야기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아마도 제주도의 풍광이 묘한 이국적인 감성을 자아내기도 하고 또 깊이 묻어 두었던 옛 사랑을 다시 수면 위로 길어내는 감수성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4.3 사건 당시 비극의 현장이었던 ‘곤을동’ 마을 사건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듯 합니다.
시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곤을동(坤乙洞)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화북천 지류를 중심으로 밧곤을, 가운데 곤을, 안 곤을로 나눠지는 동네인데, 역사 사료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26년(서기 1300년)에 별도현(別刀縣)에 속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 마을이 만들어진 것이 700년이 넘는 옛 마을입니다. 주민들은 농사를 주로 했으며, 멸치잡이 어업도 겸하면서 약 40여호가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1948년, 아마도 요즘 같은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어느 날 갑자기 평화로운 이 마을에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누런 군복을 입은 토벌대가 곤을동 마을에 들이닥치더니 집 안에 있는 주민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집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군인들은 곤을동의 젊은 사람들을 앞 바다에 세워놓고 즉시 총살했습니다. 어른들은 하루 정도 화북초등학교에 머무르게 한 뒤 다음날 총살했습니다.(출처 : 2019.4.3자 국민일보 기사 참조)
토벌 작전으로 마을 가구는 전소됐고 수많은 사람은 이유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멜(멸치의 제주도 방언) 후리는 소리’는 다시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주도는 곤을동 마을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곤을동과 관련된 4.3 사건 당시의 정황을 알고 난 후, 이 시를 다시 읽으면 시인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이해가 되고 또 그 당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스러져간 사람들의 슬픈 사연 때문에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슬픈 옛날이 되었지만 지금도 억새밭에서는 그 흔들리는 소리가 세월 속에서 슬픈 노래가 되어 들려오는 듯 합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 때 그 사람들이 어허어야 뒤야로다 노래하면서 멸치 후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이런 청각적인 은유를 참 많이 동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에서부터 귀 기울이면 들릴 것 같은 멜 후리는 소리, 멀리 날아가는 까마귀 선소리 등이 그것입니다.
물이 고여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데, 이제 그 물마저 다 말라가고 있다고 느낀 것은 시인만의 마음일까요. 이제 더 이상 묻어두지 말고 살아남은 자들이 무엇인가라도 그들을 위해서 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한 마음이 엿보이는 이 시를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에서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저 슬픈 과거를 들춰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곤을동’ 마을 이름에 내포된 의미처럼, 우리가 모두 함께 모여 사는 모습을 노래하면서 시를 맺고 있습니다.
이번 제주 출장 공무가 마무리되고 나면, 곤을동 뿐 아니라 억새밭 바람 소리, 까마귀 선소리 등을 들을 수 있는 제주의 호젓한 길들을 찾아 며칠 쉬었다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시간을 일부러 내서 <시인의 사랑>과 <건축학개론> 영화에서 이쁘게 찍힌 제주의 풍광들을 직접 눈으로, 발로, 그리고 귀로 확인해 보는 것도 해 보고 싶습니다. 이번에 저에게 새로 맡겨진 전국 대학교 생활관 관리자협의회 회장 중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의 기운도 이곳 제주에서 듬뿍 받아 돌아가야겠습니다.
여명이 밝아 오는 제주의 아침 하늘이 참 아름답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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