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오갈피를 자르며 / 면례(緬禮) - 김영석

석전碩田,제임스 2019. 11. 6. 06:37

오갈피를 자르며  

 

  - 김영석  

 

가을 햇볕이 아늑한  

소나무 장작가리 옆에 앉아  

약에 쓸 오갈피를 자른다  

철마다 몸살 하며 꽃 피고 열매 맺던  

오갈피는 이제 한살이를 마치고  

탕관 속에서 솔바람 소리를 내며  

바람결처럼 병을 쓰다듬는  

쓰디쓴 한잔의 물이 되리라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면 삶이란  

물결 지며 흘러가는 강물이구나  

슬픔도 기쁨도 괴로움도  

크고 작은 물이랑으로 흐르는구나  

강물이 어찌 물결도 없이  

고요히 멈추어 흐를 수 있으랴  

삶이 곧 병이고 병이 곧 물결인 것을  

햇볕 든 소나무 장작가리 옆에서  

따뜻하게 흘러가는 쓰디쓴 물을  

새삼 다시금 바라본다.  

 

- 시집 <바람의 애벌레> (시학, 2011)  

 

* 감상 : 何人 김영석. 1945년 전북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주 북중학교와 전주고를 졸업하

 

고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서 공부하였으며,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방화'가 당선되었고,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도 단식이라는 시로 당선되었습니다. 1981년에는 <월간문학>평론에 당선되기도 하였습니다. 시집 <썩지 않는 슬픔>(창작과 비평사, 1992), <나는 거기에 없었다> (시와시학사, 1999), <모든 돌은 한때 새였다> (시와시학사, 선시집, 2004), <외눈이 마을 그 짐승> (문학동네, 2007)이 있으며 저서로는 <의 시학>, <한국 현대시의 논리>, <와 생태적 상상력>, 그리고 번역서로 <삼국유사>, <구운몽>등이 있습니다. 1985년 박사학위 취득과 동시에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가 되었고 2010년 정년퇴직한 후 부안군 신서면 능가산 아래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고향으로 귀촌하였습니다.  

 

인은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으며 휴학을 하고 부안 앞 바다에 있는 하도(荷島)에서 지냈던 일 년의 경험이 시인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복학과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당시 주요섭, 김광섭, 황순원, 조병화, 김진수 등 이름난 문인들이 포진하고 있던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문학의 스승들과 또 정호승, 조태일, 조해일, 전상국 등 동료 문인들을 만나서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평론가들은 김영석 시인을 가볍게 분노하거나 서투르게 절규하지 않으며 절제있는 묘사를 통해 각인하는 힘이 있는 작품을 쓴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저는 저의 유년 시절과 2006년 돌아가신 어머니를 아련하게 떠 올렸습니다. 겨울철 동네 친구들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나무 한 짐을 지고 산을 내려오면서 양지 바른 곳에 자라는 인동초 넝쿨을 발견하고 그것을 잘라 나뭇짐 사이에 넣어오면, 어머니는 얘가 약 단술이 먹고 싶은 모양이구나생각하고 맛있는 단술을 만들어 주시곤 했습니다. 제가 나고 자랐던 고향 마을에서는 식혜를 단술이라고 불렀고, 특히 인동초 줄기를 삶은 물로 만든 식혜를 약단술이라고 불렀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변변한 간식거리도 없는 긴 겨울 한 철을 그나마 건강하게 지나게 해 보려고 애쓴 눈물겨운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약단술이, 갑자기 이 시를 읽으면서 생각이 난 건 왜일까요?  

 

마도 김영석 시인도 이런 느낌으로 이 시를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는 한약재로 쓰이는 오갈피 나무를 자르면서 그것이 약탕기 안에 들어가 솔바람 소리를 내면서 쓰디쓴 한 잔의 약 물로 변신되는 과정이, 마치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마치 철학자가 삶이 무엇인지고민하는 듯, 그 것을 시적은유로 삼아 노래하고 있습니다  

 

탕기 안에서, 오갈피를 우려내어 생기는 그 물이나,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이나, 그리고 우리 인생의 강물이나 매 한가지지라는 깨달음이 바로 이 시를 지탱해주는 줄기입니다. 그리고 잔잔한 것 같지만 쉼 없이 물결을 만들어 내며 흘러가는 강물의 모습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고, 병이고, 또 그 병을 고치려는 오갈피의 쓰디 쓴 약물인 것을 시인의 혜안으로 꿰뚫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이란 그런 슬픔도 기쁨도 괴로움도 가득한 물결이지만 한 살이를 마치고, 탕관 안에서 누군가의 회복을 위해서 따뜻하게 끓고 있는 약물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히 제 할 일은 다한 것이라고 위안하는 것입니다.  

 

을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쬐는 시골집 마당에 장작불이 타고 있고 그 위 약탕기에서는 연신 솔바람 소리가 들리며 온통 약 향기가 진동을 하는 고즈넉한 시골집, 수채화 같은 풍경이 그려지는 시 한 편을 읽으면서, 그리운 어머니가 생각이 나고 또 물결 반짝이며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살되, 따뜻한 온기로 누군가의 병을 쓰다듬는 물이 되길 결심하게 했으니, 이 시는 새삼 자기의 사명을 다 한 것이겠지요.  

 

물을 보이는 모습이 아닌 관념과 철학의 본질로 해석해야 한다는 관상시(觀象詩)’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을 듣고 있는 김영석 시인은 그의 저서 <의 시학(詩學)>(1984)을 통해 서양적 시각이 아닌 동양적 시각, 나아가서 아시아적인 시각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시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또 다른 시 하나만 더 읽어 보겠습니다. 이번 주말 고향에 가서 선영 주변에 배롱나무 몇 그루 더 심는 계획을 하고 있다 보니 이 시가 더욱 정감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지켜보고 있는 이름모를 산새의 존재가 갑자기 각인이 되어 옵니다.  

 

면례(緬禮)

       

 - 김영석  

 

산역꾼 몇이 초가을 햇살을 받으며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파 놓은 생땅 흙이 선홍색이다   

모두 흰 장갑을 끼고   

한쪽에서는 낱낱이 백지에 곱게 싼   

유골을 조심스레 풀어서 늘어 놓고   

한 중늙은이는 구덩이에 들어가   

흙바닥에 여러 겹 백지를 깔아 놓는다   

뼈를 가까스로 다 맞추어 놓았는데   

완전히 삭아서 없어진 곳이  

군데군데 비어 있다   

하얗게 빈 곳에 햇살이 눈부시다   

 

배롱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산새 하나가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는 산역꾼들을   

죽 지켜보고 있다  

 

- 시집 <모든 구멍은 따뜻하다> (황금알, 2012)  

 

르는 크고 작은 물 이랑 위로 내려 앉는 가을 햇볕이 너무도 아늑하고 따스한 좋은 계절, 시인의 눈과 귀, 마음이 되어 주변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즐길 수 있길 소망해 봅니다. - 석전(碩田)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학 강의 / 물 - 임영조  (0) 2019.11.20
부부 - 문정희 / 함민복  (0) 2019.11.13
늙은 애인 - 문모근  (0) 2019.10.30
물끓이기 / 참숯 -정양  (0) 2019.10.23
친구를 위한 기도 - 박인희  (0) 2019.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