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물끓이기 / 참숯 -정양

석전碩田,제임스 2019. 10. 23. 06:35

물끓이기    

 

 - 정 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 시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 1997)  

 

* 감상 : 정양 시인. 1942년 전북 김제읍 신풍리에서 사회운동가인 정을(鄭乙), 보통학교 교사인 노함안(魯咸安) 사이에서 3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6.25 전쟁 중 김제 중앙초등학교, 서울 효제초등학교, 다시 김제 공덕초등학교 등을 다니며 극심한 흉년을 겪는 가난한 마을의 배고픈 아이들과 어울려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리 남성중, 남성고를 거쳐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죽산 중고등학교 교사로 부임, 원광고, 전주 신흥고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원광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마치고 마지막 교직은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 2007년 정년 퇴임하였습니다.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청정을 보며가 당선되었고,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윤동주 시 평론 동심의 신화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퇴직 후, 2016년 시인 안도현, 김용택 등 전북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 20여명과 함께 지역 출판사인 모악을 설립, 문학의 다양성과 지속성 실현을 위해 출판사를 직접 경영하고 있습니다.  

 

집으로는 <까마귀떼>(은애, 1980), <수수깡을 씹으며>(청사, 1984), <빈집의 꿈>(푸른숲, 1993),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창비, 1997),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문학동네, 2005), <나그네는 지금도>(생각의 나무, 2006, 시선집), <철들 무렵>(문학동네, 2009), <헛디디며 헛짚으며>(모악, 2016) 등이 있으며, 7회 백석 문학상, 8회 구상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양 시인의 시는 언뜻 보면 단순해 보이고 또 수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소박하지만 시의 뒷 편에는 삶의 내공이 쌓인 탄탄한 힘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풍물에 대한 애정, 그리고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저항 정신이 풍자와 해학이 곁들여지며 역동적으로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를 함께 감상하는 지인 한 분이 보내 주신 시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곰국 끓여내듯 구수한 감칠맛이 나는 시여서 소개해 봅니다.  

 

마도 시인은 책 한 줄을 읽으면서 밤공부를 하다가 출출해져 라면이나 국수라도 하나 끓여 먹을 심산으로 냄비에 물을 끓이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팔팔 끓는 물을 바라보면서 시상이 떠올라 국수 끓이는 것도 잊고 이 시를 썼습니다. 마지막 연을 보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다산에서부터 김수영 시인, 그리고 그 전에 나를 부글 부글 끓게 했던 순간들의 메모를 찾아 시 한 편을 쓰느라 끓고있었으니까요.  

 

20년 전에 씌여 진 시이지만, 요즘과 같이 태극기 부대와 촛불 부대가 극명하게 갈라져 저마다 목소리를 내며 상대편을 바라보면서 부글 부글 끓고 있는 상황에서 읽으니 딱 맞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어느 편이든 그 날에 맞춰 그 곳에 나가면 나 혼자만 끓는 게 아니라 같이 끓고 있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천만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나 혼자만 끓고 있으면 끓어 오르는 놈만 미쳐 보이고 열 받는 놈만 쑥스러울텐데, 같이 열받은 것을 풀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며 맘껏 끓어올라도 괜찮은 세상이 된 것만으로도 시인의 소망이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비 속에서 마음껏 끓고 있는 끓는 물을 보고도 이런 맛있는 시를 하나 뚝딱 써 내는 정양 시인의 시는 이렇듯, 일상 생활 중에서 떠오르는 시상이 작품의 중요한 소재가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보너스로 그의 대표 시로 소개되고 있는 참숯이라는 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참숯  

 

 - 정 양  

 

간장독에 띄울 숯을 사러   

읍내에 간다  

나무 타다 만 게 숯인데  

나무토막 태워서 쓰자고 해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는 참숯을 써야 한단다   

 

읍내장터를 다 뒤져도 숯이 없다  

가슴속한 세상 더글거리는  

타다만 숯덩이들은 쓸모가 없겠지  

육십릿길 더 달려간 도회지 시장통에서  

가까스로 숯을 만난다  

휘발유 값이 몇 배는 더 들겠다   

 

불길이 한참 이글거릴 때  

바람구멍을 꽉 막아야  

참숯이 된다고  

참숯은 냄새도 연기도 없다고  

숯가게 할아버지 설명이 길다  

참숯은 냄새까지 연기까지   

감쪽같이 태우나 보다   

 

이글거리기도 전에 숨통이 막힌  

내 청춘은 그나마 참숯이 되어 있는지  

언제쯤 냄새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릴지 어쩔지  

간장독에 둥둥 떠서 한평생 이글거리지도 못할  

까만 비닐봉지 속 숯 토막들이  

못 견디게 서걱거린다   

 

-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문학동네, 2005)   

 

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에서 시인이 다 타고 버려 진,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는 연탄 한 장을 바라보다가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아는 멋진 시 한 편을 탄생시켰다면, 정양 시인은 아내의 특명을 받고 육십리가 넘는 시내 장터까지 숯을 사러 갔다가, 구하기 힘든 참숯을 보고 이런 멋진 시를 썼습니다. 참숯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 듣고, 문득 청춘이 다 지나 간 자신의 인생이 새까맣게 타 버린 숯과 같아 이것을 시적 은유로 삼아 이런 멋진 시를 지은 것입니다. 까만 비닐 봉지 안에서 서걱거리는 숯들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삶에서 들리는 서걱거리는 소리를 들은 탓일 것입니다. 이제는 한 평생 이글거리지도 못할 숯 토막들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마치 시인의 말년을 대변하는 듯 쓸쓸하게 들려옵니다.  

 

'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끓는 물처럼 주어 진 삶을 그렇게 살아 내고 싶다고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이 내 마음입니다. 당당하게 끝까지.....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