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가을의 소원 - 이시영

석전碩田,제임스 2019. 10. 2. 06:34

가을의 소원   

  

                                     - 이시영   

 

내 나이 마흔일곱  

나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손발을 지닌   

곰금주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며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보는 일  

 

- 시집 <사이> (창비, 1996)   

 

* 감상 : 이시영 시인. 194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습니다.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공부하였습니다. 1969<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가 당선되었고, 같은 해 <월간문학> 신인작품 모집에 시 <채탄> 등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작과비평사> 편집장, 주간, 부사장을 거쳐 지금은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에 참여한 이후 계속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창작과 비평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이시영 시인의 시는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가 엿보이는 서정시를 쓰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 시집으로 <만월(滿月)>(1976), <바람 속으로>(1986), <길은 멀다 친구여>(1988), <피뢰침과 심장>(1989), <이슬 맺힌 사랑 노래>(1991), <무늬>(1995), <사이>(1996), <조용한 푸른 하늘>(1997), <은빛호각>(2003) <바다호수>(2004), <아르갈의 향기>(2005) 등이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이 시를 읽으면 이제 인생의 전반전을 끝내고 막 후반전으로 나아가는 시인의 가을맞이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 합니다. 마흔 일곱이란 나이가 그리 많다고 느껴지진 않지만, 시인은 아마도 그 나이가 많이도 버겁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치 인생의 가을쯤으로 느낀 듯 합니다. 그리고 마치 추임새를 넣듯 괄호 안에 추가해 놓은 말들이 재미있는 리듬이 되어 시를 읽는 재미를 더 해 줍니다.  

 

을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일게 하는 계절입니다.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가을이라는 계절에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사랑을 하고 싶은 계절이기도 하고, 또 익어가는 들녘을 보면서 겸손한 모국어로 기도하고 싶어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인은 이 가을에 너무도 소박한 소원 하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정처없이 섬진강 길을 터덜 터덜 걷다가 늘 들리곤 했던 강변 횟집 주인 친구를 만나 그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면서 소처럼 씨익 한번 웃어주는 소박한 소원 말입니다  

 

'가 씨익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시에서 시인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또 어떤 느낌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동네 친구들과 소 먹이러 다니는 어린 시절에 소와 함께 뒹굴며 자연에서 생활했던 유년의 추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표현의 진정성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소가 씨익 웃는 경우는, 대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기차게 맛있는 쇠죽이나 음식()을 한번 맛보고 난 후이거나, 아니면 발정난 황소가 교미 시기가 된 암소가 누는 더운 오줌 줄기맛을 보고 나면 의례히 고개를 들고 코를 벌름거리면서 하는 행동입니다. 그 웃는 표정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 없다는 그런 천진난만한 순수한 표정 그 자체이지요. 아마도 좀 이르긴 하지만, 이 시인이 마흔 일곱에 느꼈던 그런 비운 마음'을 표현하는 표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차 하면 관계나 정계에 나가 큰 일을 한 번 해 볼 요량이었던 지난 날을 다 내려 놓고 이제는 진즉 깨달았어야 할 그것을 받아들이는 체념이 남원, 곡성, 구례로 이어지는 섬진강 길, 고향 길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이 가을에는 시인처럼 어디론가 떠나 단풍 드는 고즈넉한 길을 걸으며 가을 향수에 뿍 빠지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디 맑은 공기 속에서 가진 것 하나 없지만 그저 모든 것을 가진 듯 씨익 웃는 모습은, 바로 이 시를 시가 되도록 살려주는 멋진 시적 은유입니다.  

 

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데, 월요일 아침 출근하니 10월 한 달간은 꼼짝도 못할 정도로 긴급한 업무들이 줄줄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수시 입시로 인해 모든 교직원들이 정상 출근을 해야 하고, 17일부터는 교육부 종합 감사를 받아야 하는 일정이 통보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 처음 생긴 학과인 공연예술학부에는 50명 모집인데 무려 5 천여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려 장장 5일간에 걸쳐서 실기 입시를 치러야 한다는 무거운 소식입니다  

 

렇게 일이 갑자기 몰려 오지만, 업무를 힘들게 처리해야 하는 동료들의 어깨를 서로 툭 쳐 주며 소처럼 씨익 한번 웃어보는 것으로 여유를 가져 볼 일입니다. 가을이니까요.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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