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를 찾아가다가
- 임보
<마누라 음식 간보기>란 내 글이
담양의 어느 떡갈비집에 크게 걸려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처럼 고향 내려가는 길에 찾아갔더니
몰려드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다
얼마나 기다려야 되느냐고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50분도 더 넘어야 한다는 대답이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이리 붐빈 걸 보면
이 집의 남다른 비결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일정에 쫓겨 그 집의 갈비 맛도 못 보고
되돌아오면서 차 속에서 생각한다
음식 맛도 음식 맛이겠지만, 어쩌면
시가 걸린 집이어서 세상의 구미를 당긴 건 아닌지―
걸린 시의 작자가 찾아왔다고 주인에게 밝혔다면
혹 자리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아내는 투덜거리고, 아들 녀석은 농담 삼아
무단 게시에 대한 저작권을 운운하기도 하지만―
시가 밀려나고 있는 삭막한 이 시대에
손님들로 하여금 시를 생각하게 하는 그 주인이
얼마나 갸륵한 마음을 지녔는가?
고마워해야 할 것만 같다.
- 시집 <광화문 비각 앞에서 사람 기다리기> (시학, 2015)
* 감상 : 임보 시인.
1940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였습니다. 1988년 성균관대학교에서 ‘한국 현대시 운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충북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직하였습니다. 1974년 첫 시집 <임보의 시들 59 - 74> 이후 2011년 <눈부신 귀향>, 2019년 <그런 사람을 어떻게 얻지?>에 이르기까지 23 권의 시집과 동인지, 시론집을 펴냈습니다. 프랑스 상징주의 천재 시인 랭보(J. A. Rimbaud, 1854~1891)에 심취하여 그의 이름에서 따 온 임보(林步)는 필명이며 본명은 강홍기(姜洪基)입니다. 인수봉이 보이는 우이동 운수재(韻壽齋;그의 집)에 오래 살면서, 그 주변의 시인들과 <우이동> 동인지 활동을 해 온 것이 그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시인 이생진, 홍해리, 채희문, 임보(강홍기)로 구성된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이 그것입니다.
임보 시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지난 2009년 문정희 시인의 시, ‘치마’에 대해서 답가 형식으로 쓴 그의 시 ‘팬티 – 문정희의 치마를 읽다가’라는 시로 인해 인구에 회자된 사건일 것입니다. 1947년생 전남 보성 출신 문정희 시인과 1940년생 전남 순천(곡성) 출신 임보 시인 간의 걸쭉한 남도 입담이 담긴 이 두 편의 시는 당시, 또 다른 중재 형식의 시들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세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야한 듯 하면서도 예술적인 시라고 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인간의 본성에 화답하는 듯 시인들의 재치가 번뜩이는, 주고 받는 시는 예술과 문학 세계의 풍류를 만끽하는 재미가 넘칩니다. 이곳에서 그들의 시를 새삼 소개하는 건 자제하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임보 시인이 고향 근처 어느 식당에 자신이 쓴 시가 걸려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갔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구경도 못하고 돌아서서 오는 상황을 재미나게 풀어 낸 시입니다. 그리고 이 시가 어째서 시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시의 제목을 다시 읽어보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내 시를 찾아가다가’라는 제목은 어느 식당에 걸려 있다는 자신이 쓴 시를 찾아가는 의미도 있지만, 시인 스스로 50년 시업(詩業)을 해 왔지만 아직도 자기 나름의 시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이해하면 한 편의 재미나는 멋진 시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그의 시에는 아내, 아들 등 가족이 등장하기도 하니 그가 시를 찾아가는 여정은 자기 혼자만의 길이 아니었다는 의미도 있을 듯 합니다. 같은 차 안(공간)에서 온 가족이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조차도 훌륭한 시 소재가 되었으니 분명 그의 시를 찾아가는 길은 시인 혼자만의 작업은 아니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이 삭막한 시대에, 손님들로 하여금 시 한 편이라도 생각나게 하려는 그 식당의 주인이야 말로 시인과 똑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즉 갸륵한 시인의 마음을 지닌 ‘삶의 도반’이라는 사실, 그것이 눈물겹도록 고맙다는 평범한 깨달음 말입니다.
이렇듯 그의 시는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냥 술술 읽힌다고 해야 할까요. 그의 시 속에는 이야기가 있고 해학이 있으며 한 편의 수필을 읽는 것 같은 데 어느 새 한 편의 시가 되어 마음 속에 감동이 일게 하는 마법이 있습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담양의 어느 떡갈비 집에 걸린 임보 시인의 ‘마누라 음식 간보기’ 시를 이쯤에서 함께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마누라 음식 간보기
- 임보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내 앞에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한다
그러면
"음 맞구먼 맛있네"
이것이 요즈음 내가 터득한 정답이다
물론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지만
만일"좀 간간한 것 같은데 하면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나서
뭣이 간간허요 밥에다 자시면 딱 쓰것구만' 하신다
만일
좀 삼삼헌디 하면 또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나서
"짜면 건강에 해롭다요 싱겁게 드시시오" 하시니
할 말이 없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고
아내 음식 간맞추는데 평생이 걸렸으니
정답은
"참 맛있네"인데
그 쉬운 것도 모르고.
- 2004년 10월 발표시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달아지는 것 중의 하나가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운 것이 부부 사이에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입니다. 시인이 평생을 걸려서 깨달은 삶의 비결입니다. 음식 간을 보면서 ‘참 맛있네’라는 너무도 간단하고 쉬운 말이 정답이었습니다.
벌써 6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제가 근무하고 있는 기숙사로 발령이 난 이듬 해인 2013년 이맘 때 쯤, 그 전 부서에서 가깝게 지냈던 동료 선생님 한 분이 암 투병을 하다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운명을 달리하기 한 달 전, 바싹 마른 몸을 이끌고 일부러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가 작은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평소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가 들려 준 정답은 그만큼 제 귀에 크게 들려왔습니다.
‘배 선생, 내가 인생의 정답을 발견했고 알려주려고 이렇게 왔어요.’
‘그게 뭔데요?’
‘응, 다 내려 놓으면 돼. 아등바등하지 말아요. 내가 왜 그러지 못했는지 안타까워....’
오늘 임보 시인의 시 두 편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삶의 정답이 뭔지를 되새겨 봅니다. 내 시를 말도 하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저작권 운운하면서 멱살잡이 하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가 밀려나고 있는 삭막한 요즘같은 현실 속에서, 한 편의 시라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그 갸륵한 마음을 알아주는 넉넉한 시인의 마음, 내려 놓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발견해야 할 가장 쉬운 ‘삶의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것이 ‘시인’이 자기 시를 찾아가는 길 끝에서 만나는 정답이기도 할테니까요.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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