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 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과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 김승희 시산문집,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마음산책, 2007)
* 감상 : 김승희(金勝熙) 시인. 1952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970년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강대 영문학과에 입학, 졸업과 동시에 同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이상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7년 정년퇴임, 현재는 이 대학의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에도
당선되었습니다. 여성 시인으로서, 여성들의 어쩔 수 없는 속박과 존재론적인 부자유스러움을 표현하다 보니 페미니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서정성 있는 시로 2018년에는 백석대 서정시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시집으로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등이 있으며 산문집 <33세의 팡세>, <남자들은 모른다>,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등과 소설로는 <산타페로 가는 사람>,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 등이 있습니다.
지난 주 어느 날, 초등학교 친구 하나가 이 시를 뜬금없이 보내왔습니다. 일주일에 한 편 씩 읽는 시로 소개하면 좋겠다든지, 이 가을에 마음에 든다든지 무슨 멘트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저 시인의 이름과 이 시의 제목만 달랑 보내왔습니다. 상담을 공부해서 인지,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곧바로 전화를 걸었더니 다행스럽게도 별 일은 없답니다.
시인은 우리 말 ‘그래도’라는 접속 부사를 ‘그래島’로 해석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정통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면, ‘언어유희’라고 꾸지람을 할 만하지만, 시를 읽다보면 그게 아닙니다.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는 말을 간절히 하고 싶어 ‘그래島’라는 섬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섬은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도 더 낮은 곳에’ 있지만,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은 ‘이글 이글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사는 섬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실려 있는 그녀의 책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의 편집자 서평에 있는 글을 그대로 한번 옮겨 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오늘 이 시를 쓴 작가 김승희 시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는 여성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딸이자 엄마, 그리고 아내, 며느리, 주부로서 한 시대를 호흡하는 김승희의 글과 김점선의 그림이 한데 어울린 시산문집이다.
이 책은 2003년 10월부터 2004년 5월까지 김승희 시인이 조선일보에 김점선 화백의 그림과 함께 연재했던 산문 30편에 미발표 신
작시 18편과 꾸준히 사랑받는 시 14편, 신작 산문 1편을 곁들여 총 31편의 산문과 32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지은이가 「책머리에」에서 말한 것처럼 시와 산문에는 시인이 “새로 부딪치게 된 ‘여성 생존’이라는 헐벗은 존재의 힘겨운 문제와 ‘가족 생존’이라는 애환의 풍경이 쓰라리게 담겨”(5쪽) 있다. 그간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각인되어온 김승희 시인이 새로이 천착한 ‘가족’과 ‘사랑’에 대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여기에 풍부한 영감과 여성성을 드러내 보이는 화가 김점선의 그림이 어울려 여성의 일상, 더 나아가 남녀 구분을 넘어선 우리의 일상을 이성과 감성 두 눈으로 돌아보게 한다.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여자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다. 사내 성희롱 사건을 원만히 해결하려다 미움을 사는 지은이의 후배에서부터 사랑이란 찾아볼 수 없는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들, 아들의 가정에 끝까지 ‘배후의 여자’로 남길 원하는 어머니들, 자기 자식밖에 모르는 슈퍼에고(super-ego)적 엄마들, 젊어서는 죽어라 가족을 위해 일하고 늙어서는 남편에게 황혼 이혼을 당하는 지은이의 친구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아는 그러저러한 삶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일터에 나갔다 “아침에 가스레인지 위에 들통을 올려놓고 가스불을 켜둔 채 나온 것 같은 생각이 엄습”(65쪽)해 소방서에 전화해보고 안심하는 지은이 또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여자들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지은이는 사회 통념화 된 억압적이며 야만적인 가족주의가 “사람 사는 세상의 봇물을 트게 만드는”(167쪽) 그런 따스한 사랑의 성性이자 ‘제1의 성’인 여성女性을 발휘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작 두 개의 손만으로 딸, 엄마, 아내, 며느리, 주부로서 열심히 살아가야 하느라 ‘여자’로서 “항상 ‘손의 부족’을 느끼게 되고 무언가를 깜박 빠뜨린 것만 같은 실패와 재난의 두려움을 가지게”(67쪽)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현실의 굴레 안에서 버거워하는 여성으로서 한숨만 쉬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이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분노의 질곡들을 5월 단옷날 푸른 하늘 높이 솟구치는 아름다운 그네와 같은 사랑과 상승의 힘으로 바꿀 수 있을까?”(61쪽) 지은이가 찾은 답은 바로 사랑이다. ‘그래도’. 이 짧은, 종결사가 아닌 ‘접속사’ 한마디에 지은이는 길고 긴 메시지를 실어 보낸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든 삶의 고비에서 자살이라는 단어를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저 개인적으로도 불과 몇 개월 전에 유명 연예인으로 활동하던 처질부가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는 슬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극단의 선택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시인 김종삼이나 박재삼이 아니더라도 우리 각자 서로가 삶의 애환을 나눌 수만 있었어도 좋았을 것을....뭐가 서로 그리도 바쁜지 정작 필요할 때에는 함께 있어주지 못했으니 그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그래島’ 섬에는 그래도 환자 옆에서 힘을 내서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부도가 나서 거리에 나 앉게 된 상황에서도 서로 부둥켜 안고 사랑의 손을 놓지 않는 가족들이 있는 곳입니다.
며칠 전,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그 가사에 필이 꽂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 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아마도 김승희 시인이 노래한 <그래島> 섬에는 ‘삶의 해답이 사랑’임을 깨달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바람의 노래를 애창하며 정답게 살아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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